자유무역과 세계경제
중상주의시대의 무역관
인류는 아주 오래전부터 교역을 했다. 최초의 장거리
무역상품인 흑요석(Volcanic glass)은 철이 발명되
기 이전에 날카로운 칼날의 역할을 한 것으로 석기시대
의 첨단 하이테크다. 오늘날에도 수술칼에 사용될 정도
로 매우 단단한 광물이다. 최근 미국의 인기 드라마 ‘왕좌
의 게임’에서 좀비를 죽일 때 사용한 칼이 바로 이 흑요석
이다. 터키 남부의 타우로스산맥에만 매장이 된 흑요석
이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발상지인 하란 등지에
서 발견이 되는데, 이는 BC 8000경에도 흑요석이 장거리
무역상품으로 거래되었다는 의미다.
역사에 이러한 자발적 교환행위 또는 무역을 통해서 부
자가 된 나라가 많다. 일찍이 지중해의 미케네 문명, 페니
키아 문명, 그리고 그리스 문명의 아테네 등이 그러했다.
중세로 오면 이탈리아반도의 베네치아가 무역으로 강대
국이 됐다. 인구 17만 명밖에 되지 않는 작은 섬나라 베네
치아가 15세기 이후 200년 동안 오스만투르크 제국과 7차
례 전쟁을 치르면서 기독교권을 지켜낸 것은 바로 이 무
역이 가져다준 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베네치아의 국력은 프랑스와 비슷한 정도였고, 베
네치아가 지배하는 지역의 인구는 600만 명에 이르렀다
고 한다. 최근 뉴욕타임즈가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인류
역사상 최고의 시대를 16세기 베네치아를 꼽을 정도로 화
려한 부를 누렸다.
그런데 인류는 상당히 오랜 세월 동안 무역이 양 당
사자 모두에게 이익을 가져다준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
다. 무역을 하면 한편이 이익을 보면 다른 한 편은 손해
를 본다고 생각했다. 즉 교역 이후에 양 당사자의 이익
과 손해를 합치면 제로가 되는 제로섬 게임(Zero-sum
Game)이라고 인식했다. 이것이 절대주의 시대의 중상주
의(Mercantilism)적 경제관이었다. 중상주의 시대에는 부
의 본질이 돈 즉 금덩어리라고 하는 중금주의(重金主義,
Bullionism) 사상에 젖어있었다. 그래서 수입을 하면 금이
나 은과 같은 화폐가 나간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국익에
손해가 된다고 인식하고, 되도록 국내에서 모든 것을 자
급자족하는 것을 이상으로 삼았다. 반면에 수출은 금이
들어오는 것이므로 국가에 이익이 된다고 생각하고, 저
마다 수출만 하려고 하니 무역이 성사되기 어려웠다. 그
래서 수출을 위해 해외 식민지를 개척에 열을 올렸다. 식
민지와 본국 사이의 무역이 있었지만, 이는 식민지로 확
대된 자급자족체제에 불과했다.
자유무역의 태동
이러한 중상주의 시대의 무역관을 비판한 것이 애덤 스
미스이다. 그는 자유무역은 무역의 양 당사자 모두에게
이익이 된다고 하는 ‘절대우위설’을 주장했다. 두 나라가
서로 절대적으로 싸게 생산할 수 있는 제품 생산에 특화
해서 서로 교환을 하면 두 나라 모두에게 이익이 되므로,
무역은 제로섬 게임이 아니라, 포지티브 섬 게임(Positive�sum Game)이라는 것은 이제 상식에 속한다.
이러한 이론의 영향을 받아 먼저 영국이 가장 먼저 자
유무역 정책을 펼치게 되었다. 1786년에 영국과 프랑스는
최초의 자유무역협정(이든협정)을 맺었다. 1789년 프랑스
대혁명과 나폴레옹 전쟁(1803-1815) 등으로 인해서 한동
안 자유무역은 위축되었지만, 영국은 지속적으로 자유무
역을 추진하면서, 수출을 억제하는 규제들을 철폐했다.
1846년에는 수입을 하지 못하게 했던 곡물법(Corn Laws)
을 철폐하고, 1849년에는 무역에 장애를 주었던 항해법
(Navigation Acts)도 철폐했다. 그런 후 영국과 프랑스는
다시 1860년에 통상조약(콥든-슈발리에 협정)을 맺었
다. 그리고 영국, 프랑스, 스페인 등 강대국들은 1860년
대 10년간 상호 자유무역협정을 체결하면서 자유무역
이 크게 확산되었다. 미제스(Ludwig Mises)는 나폴레옹
전쟁부터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직전인 1913년까
지 약 100년간을 자유주의 시대로 보았다.
반(反)자유주의로 반전
그러나 19세기 말에 자유주의의 사조는 도전에 직면했
다. 그 이유는 1873년부터 1896년까지 20여 년에 걸쳐 유
럽에 장기 불황 즉 디플레이션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이
23년 동안 7년의 회복기를 제외하고는 불황이었다. 그리
고 이 시기의 특징은 전 유럽에 걸쳐서 농산물 가격이 장
기적으로 하락했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이다. 19세기 말
에 공업화가 심화돼 생산이 크게 늘어, 다 소비되지 않았
기 때문이라는 ‘과소소비설’이 있다. 또한 기선의 보급으
로 대서양 횡단수송비가 약 10분의 1로 하락되고, 철도운
임비도 절반 이상 하락해 신대륙의 저렴한 농산물이 유
럽시장에 유입되었기 때문에 유럽농산물 가격이 하락했
다. 아직 농민의 비중이 높았기 때문에 농업불황은 곧 경
제 전체의 불황으로 이어졌다. 이렇게 해서 19세기 말에
유럽에서 장기적인 대불황이 발생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 유럽 각국은 관세율을 높이고 보
호무역주의로 돌아섰다. 그리고 수출할 곳을 찾아 식민
지 쟁탈전을 벌였다. 그리고 러시아에서는 1917년에 볼셰
비키 혁명으로 공산주의가 등장해 자유진영과 무역이 단
절되었다. 게다가 미국에서는 1929년에 대공황이 시작되
어 후버정부는 국내시장을 보호하기 위해서 1930년 6월
에 홀리-스무트관세법(Hawley-Smoot Tariff)을 통과시켜
관세율을 대폭 인상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미국은 75개
국으로부터 보복관세를 당했는데 그로 인해서 세계무역
이 1933년에는 1929년의 3분의 2 수준으로 하락해서 결국
대공황을 세계에 파급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1차 세계대
전과 대공황을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서방 강대국들은
자유무역의 중요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 다시 식민지
쟁탈전에 열을 올렸고, 그 결과로 세계는 제2차 세계대전
을 경험하게 되었다.
자유무역의 회복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갈 무렵인 1944년 7월 1일에 미
국 뉴햄프셔주의 작은 마을 브레튼우즈에서 서방세계의
44개국 대표들이 모여서 제2차 세계대전의 원인이 되었
던 경제민족주의와 식민지 쟁탈전에 대한 반성을 하고,
전후 세계경제질서를 어떻게 할 것인가 논의했다. 전쟁
전에 각국은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 경쟁적으로 자국 화
폐의 평가절하로 ‘인접국 궁핍화정책’을 실시했는데, 이
러한 무질서를 바로잡기 위해서 금 1온스의 가격을 미화
35달러로 고정하고, 각국의 화폐가치를 금의 가치로 표
현함으로써 보다 고정적인 환율제도를 운용하기로 결정
했다.
각국의 화폐가 금의 가치에 완전히 고정되어 있는 고정
환율제도 대신에 1퍼센트 범위 내에서 환율의 변동을 허
용하는 ‘조정가능 페그(Adjustable Peg)’ 제도이다. 당시 세
계 금의 70퍼센트를 보유하고 있는 미국의 달러화를 금
으로 태환이 가능하게 하고, 다른 나라의 화폐는 달러화
와 교환함으로써 금과 태환이 가능하도록 하는 방식으로
화폐의 가치를 유지하는 금환본위체제이다.
그리고 국제통화체제의 감시 및 협력을 위해서 국제통
화기금(International Monetary Fund, IMF)을 설립하여 환
율 유지가 어려운 국가에 대해서는 IMF가 긴급자금을 빌
려줌으로써 국제적으로 통화질서를 세우기로 했다. 그리
고 가난한 저개발국가에 대한 원조를 위해서 세계은행을
설립했다.
또한 국제무역질서를 확립하기 위해서 1947년에 쿠바
의 수도 하바나에서 ‘하바나 헌장(The Havana Charter)’
을 채택해 국제무역기구(International Trade Organization,
ITO)를 설립하여 전후 국제무역의 질서를 세우려고 했다.
미국 행정부의 주도하에 이 하바나 헌장이 채택됐음에도
불구하고 미국 의회는 이 하바나 헌장의 비준을 거부해,
ITO의 설립은 실패로 끝났다.
그러나 국제무역을 위한 질서는 필요했기 때문에 다
자 간 무역협상을 위한 절차와 기본 원칙들을 제공하기
위해 GATT(The General Agreement on Tariffs and Trade)
협정을 체결했다. GATT는 국제무역기구와 같은 기구
(Organization)이 아니라 협약(Agreement)에 불과하지만,
국제무역기구 대신에 세계무역을 담당하는 기구와 같은
역할도 했다. GATT는 각국 간의 평균 관세율을 낮추기
위해서 다자간 GATT 회담을 진행했다. 1947년의 제네바
라운드에서 1986년에 시작된 우루과이까지 총 8차에 걸
친 다자간 무역협정, 즉 라운드(Round)를 통해 자유무역
을 확산시켰다. GATT 출범 이후 8번째 라운드인 우루과
이 라운드에서 마침내 세계무역의 자유화를 위한 기구인
WTO(World Trade Organization)가 탄생했다.
자유무역이 세계경제에 미친 영향
19세기 자유주의 시대에는 놀라운 경제적 발전이 있었
다. 이 자유주의의 결과로 20세기가 시작될 무렵의 노동
자들은 불과 한 세기 전의 귀족들보다 더 높은 소비생활
을 누릴 수 있었다. 특히 미국은 어느 나라보다 정부의 간
섭이 없이 자유로운 자본주의적 발전을 이룩했고, 20세기
에 들어오면서 ‘세계의 공장’이라고 불리던 영국의 지위
를 이어받았다. 그리고 미국의 국민이 다른 나라들보다
더 잘살게 되었다.
특히 제2차 세계대전을 경험한 서구 열강들은 식민지
를 가진 제국주의보다는 자유무역이 경제적 번영에 더
바람직하다는 확신을 가지고 식민지들을 독립시켰다.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독립한 148개국 중에는 패전국인 독
일, 일본, 이탈리아의 식민지들도 있었지만, 대부분 승전
국인 영국, 미국, 프랑스의 식민지들이었다. 그런데 식민
지에서 독립한 신흥국가들은 미국와 서구 유럽 국가들이
주장하는 국제분업 체계에 포함되기를 꺼렸다. 그 이유
는 공산주의자들과 종속이론가들이 정치적 독립을 얻은
제3세계 국가들에게 선진국과의 자유무역은 결과적으로
경제적 식민지로 떨어지게 만든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패전국인 일본과 독일이 미국의 도움하에 눈부신
부흥을 이룩하고, 아시아의 ‘4마리 호랑이’라고 불렸던 한
국, 대만, 홍콩, 싱가포르가 자유무역체제에 편입되어 놀
라운 경제성장을 이룩하는 것을 보고, 세계는 다시 자유
무역체제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래서 세계자유무역에
개도국의 참여도 크게 늘었다. 신흥공업국가들의 무역이
세계무역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1970년의 약 5%에서 1995
년에는 약 20%로 증가했다.
이제는 어느 나라도 국산품만을 애용하면서 살 수 없
게 됐다. 평균 관세율도 1950년대의 20% 수준에서 2000년
에는 3.9%로 하락했다. 공산주의 국가 중국도, 사회주의
를 표방했던 ‘제3세계의 리더’였던 인도도 자유무역체제
에 편입됐다. 이제는 중남미 국가들, 그리고 구소련 해체
이후에 동구권 국가들도 모두 자유무역체제에 편입되었
다. 이것은 바로 자유무역 이론이 옳았음을 역사가 증명
해 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