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진단> 프로파일러와 범죄 심리
화성연쇄살인사건 용의자 이춘재 자백 어떻게 볼 것인가? [오윤성 순천향대학교 경찰행정학과 교수]
수사에 동원된 경찰 연인원 180
만 명, 용의선상에 올랐던 사람
1만 8000명. 화성연쇄살인사건은 단
일 사건으로는 유사 이래 최대사건이
다. 경찰 입장에서는 1986년부터 1991
년까지 5년간 엽기적 살인 행각을 벌
인 범인이 검거되지 않아 공소시효를
넘겨 미제 사건으로 남겼다는 점에서
결국 실패한 사건이었다.
한편 수사가 발전할 수 있는 계기
가 됐다. 연쇄살인 개념이 등장했고
더 이상 과거의 자백과 강압수사로
는 안 된다는 자각에서 과학수사 특
히 DNA 분야의 괄목할 만한 발전을
이뤘다. 또 살인죄 공소시효 폐지 공
론화로 2015년 ‘태완이법’이 탄생되는
단초가 되는 등 한국의 형사 사법발
전에 기여했다.
필자는 범죄학자로서 2001년부터
19년간 화성연쇄살인사건을 범죄심
리학 수업에서 강의해 왔다. 또 공소
시효 만료 해인 2006년 이 사건을 누
군가는 정리를 해야 한다는 생각에
화성연쇄살인사건 논문을 발표한 바
있다. 이어 2011년에는 연쇄살인사건
이전 발생한 일곱 건의 연쇄성폭행사
건과의 연관성 분석을 시도한 두 번
째 논문을 발표했다.
이 논문에서는 화성지역 연쇄살인
사건과 살인사건 이전의 연쇄 성폭
행 사건 그리고 수원 화서에서 발생
한 여고생살인사건의 범인이 동일인
일 가능성을 제시했고, 범인이 수사
과정에서 여러 차례 용의자로 떠올랐
을 것이나 안타깝게도 용의선상에서
제외됐을 가능성도 주장했다.
그러나 공소시효가 만료된 사건인
지라 별다른 주목을 받지는 못했다.
필자는 이 사건과 질긴 인연이 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화성연쇄살인
범이 그 정체를 드러냈다. 지난 9월
18일,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순간이었
으나 이렇게 갑작스레 닥칠 줄은 꿈
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범인 특정 어떻게 이뤄졌나?
이 사건의 진범이 특정된 결정
적 수사 분야는 과학수사 중에서도
DNA 분석기법이다. 1990년만 하더라
도 우리나라는 독자적 DNA 분석능
력을 갖고 있지 못했다. 사건현장에
서 확보된 DNA 분석을 일본 경시청
에 세 차례나 의뢰했으나 결정적 증
거확보에 실패했다. 그로부터
30여 년이 흐른 지금 우리나라의
DNA 분석기술은 세계 최고 수준이
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화성연쇄살
인사건 과정에서 너무 뼈아픈 경험을
했기 때문이다. 이전에는 DNA 시료
가 소량인 경우 분석이 불가능했으나
이제는 사건 당시 확보한 증거로부터
채취한 소량의 시료로도 특정 DNA
부위를 증폭 후 전기영동으로 분리하
는 기법이 개발됐다. 거기에다 2010
년 제정된 ‘DNA 신원확인 정보법’에
의거 일정 조건에 해당되는 중범자의
DNA 제출을 의무화해 비교대조군을
확보하게 됐고 DB 검색 대조를 통해
용의자를 특정할 수 있게 됐다.
공소시효가 이미 지난 화성연쇄사
건이 어떤 계기로 DNA 분석을 통해
이춘재를 진범으로 특정하게 되었는
지의 정확한 과정은 밝혀지지 않았
다. 그러나 오산 경찰서에 소량이나
마 범인의 DNA 자료를 장기간 보관
하고 있었다는 점, 처제강간사건으
로 무기형을 받은 이춘재의 DNA 자
료 확보로 비교대조군이 존재했다는
점, 30여 년에 걸쳐 획기적으로 발전
한 DNA 증폭기술의 발전 등으로 결
국 화성연쇄살인사건의 진범이 민낯
을 드러낸 것이다.
이춘재가 범행을 자백한 심리는?
25년의 교도소 생활 중 1급 모범수
까지 올라오는 노력을 하면서 철저히
자신을 숨겨왔던 이춘재는 DNA 증
거를 제시하는 경찰의 압박에도 여
덟 차례 조사까지는 부인으로 일관했
다. 이런 이춘재가 왜 갑자기 경찰에
서 제시한 사건 외에 추가적으로 다
른 사건들을 자신이 저질렀다고 밝혔
을까? 그 심리적 과정을 몇 단계로 나
누어 추정해 보기로 하자.
첫째, 두려움, 당황, 좌절 단계다. 경
찰과 처음 대면했을 때 ‘어떻게 내가
범인인 것 알게 되었지?’ 하는 생각에
두려움과 당황에 떨었고 지난 25년 동
안 공을 들여왔던 가석방이 불가능해
질 것에 대해 좌절했을 것이다.
둘째, 향후 행동 방향 선정 후 포기
단계다. 도대체 경찰이 나의 범행에
대해 어디까지 얼마나 알고 있는가
가 궁금했을 것이다. 공소시효가 지
나 본인이 원하면 조사를 받지 않아
도 될 수 있었을 텐데 굳이 조사에 응
하면서까지 범행을 부인한 것은 접촉
과정에서 감을 잡아가면서 향후 방향
을 정해나갔을 것이다. 그러다 더 이
상 DNA 증거를 부정하는 것은 무의
미하므로 적극적으로 현 상황에 대처
하기로 결심한 것으로 보인다.
셋째, 전환 및 실행단계다. 공소시
효가 만료되어 자백하더라도 처벌
을 받지 않는다는 안정된 심리적 상
태가 이러한 결정의 기초가 돼 방향
을 전환하고
실행한다. 아홉 번째 조사 때 경찰
에서 DNA를 확보했다고 알려줬던
4·5·7·9차 사건 이외에도 10개의 화
성연쇄 모든 사건을 포함 14건의 살
인과 34여 건의 강간 및 강간미수를
저질렀다고 자백한다. 그렇다면 진정
으로 뉘우쳐 모든 범행을 자백한 것
일까?
그건 아니다. 이춘재는 경찰이
DNA 자료를 들고 교도소를 찾아오
는 순간까지 가석방을 통해 바깥세
상에 나가기만 바랐던 전형적인 연쇄
살인마였다. 교도소 내에서도 여성의
음란사진을 신주단지처럼 보관하고
있었다는 걸 보면 그는 성적 연쇄살
인의 꿈을 포기하지는 않았다. 타의
에 의해 가석방이 불가능하게 된 것
이다.
마지막은, 적극적 주도권 조종·통
제 단계로 자신이 향후 전개될 수사
주도권을 쥐고 상황을 조종 통제하려
는 싸이코패스 특유의 우월감에 주목
할 필요가 있다.
화성지역 추가 세 건, 청주지역
추가 두 건의 살인사건 진범임을 밝힐
때 경찰의 당황하는 모습을 그는 어떻
게 느꼈을까? 자신의 입만 바라보며
설득하는 경찰에게 ‘너희들이 모르는
사실을 내가 알려줄 수 있다’는 식의
왜곡된 우월감은 아니었을까?
경찰에게 그림까지 그려가며 미제
사건을 설명하고 있는 행동은 ‘내가
전문가니까 내 말을 들어봐, 너희들
은 모르잖아’라는 제스처다. 새로운
놀이, ‘리셋’으로 재시작할 수 있는 컴
퓨터 슈팅 게임과 같은 흥미로운 소
일거리를 찾은 것이다.
‘내가 뭐라고 해도 나를 처벌할 수
없어’, ‘나는 결코 죽지 않는 게임…’,
‘이왕 이렇게 된 거…’ 가석방은 불가
능해졌으니 향후 연쇄살인범이라는
지위를 공개적으로 내걸고 교도소 안
에서 거들먹거 리는 자신의 미래를 상상하고 있는지
도 모른다.
이춘재는 경찰 수사를 조롱하듯 화
성과 수원 관할 그리고 경기와 충북
관할을 넘나들며 무차별적 연쇄살인
을 계속했다. 화성지역 6차와 7차 사
건 사이에 발생한 화서역 여고생살인
사건과 8차 사건 그리고 8차와 9차 사
건 사이 발생한 태안읍 초등학생 김
모양 실종사건의 진범을 자신이라고
밝혔다. 9차와 10차 사이 1991년 1월
과 3월에 청주시 복대동 여고생 박모
양 피살사건과 청주시 남주동 주부
김모씨 피살사건의 진범 역시 자신이
라고 밝혔다. 그의 진술이 사실이라
는 전제하에 자백을 통해 미제 사건
들이 해결된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나
현실적으로 그를 처벌할 수 있는 법
적 근거가 없다는 사실이 많은 사람
들을 무력하게 만든다.
이춘재 자백 중 쟁점 사항
이춘재의 자백 가운데 두 가지 사
건이 쟁점화될 것으로 보인다. 8차 사
건의 진범이 이춘재 주장대로라면 대
법원 확정판결을 받고 복역하다 이
미 10여 년 전 석방된 8차 사건의 진
범 윤모씨 문제는 어떻게 되는가? 참
난감하다. 8차 사건은 범행이 피해
자의 집에서 이루어졌다는 점, 현장
에 증거를 거의 남기지 않았던 범인
이 방안에 여러 가닥의 체모를 남겼
다는 점, 속옷으로 입에 재갈을 물리
고, 매듭을 지어 몸을 묶는 등의 ‘시그
니처’(Signature)가 발견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경찰은 8차 사건을 모방범죄
로 보고 수사했고 윤모씨를 진범으로
특정했다.
특히 당시 최첨단 수사기법이었던
방사선 동위원소 분석법을 통해 현
장에 남겨진 체모 속에 티타늄이라
는 중금속 함량이 일반인의 300배가
넘고 형태학적으로 유사하다는 사실
을 국과수로부터 통보받고 더욱 확신
을 한 것으로 보인다. 아울러 윤모씨
가 피해자 오빠의 친구였다는 사실
과 ‘불구’라는 열등감 때문에 친구 여
동생을 대상으로 성욕해소를 한 것이
범행동기로 추정하며 자신 있게 윤모
씨를 진범으로 특정했다.
윤모씨는 경찰수사에서는 자신이
범인이라고 인정했으나 1심에서 무
기형이 내려지자, 2심부터 경찰의 강
압수사에 의한 자백이었다며 무죄를
주장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받
아들여지지 않았고 대법원에서 무기
형이 확정되었다.
이후 윤모씨는 복역 내내 자신의 결
백을 주장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런데 이번에 이춘재는 자신이 8차
사건의 진범임을 주장하며 진범이 아
니면 결코 알 수 없는 구체적 내용을
그림까지 그려가며 진술하고 있어 경
찰에서도 이춘재 진술에 무게를 두고
있다고 한다.
또한 이춘재는 8차와 9차 사건 사이
인 1989년 7월에 발생했던 화성 실종
초등생사건의 범인이 자신이라고 자
백해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그런데
초등생 실종사건에 대한 수사과정을
들여다보면 수사상 이해할 수 없는
결정적 과오가 눈에 띈다. 초등생 실
종 5개월 후 9차 사건 발생 장소에서
30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서 피해 아
동의 치마와 책가방이 발견됐으나 연
쇄살인사건과의 연계성을 고려하지
않고 단순실종사건으로 수사 종결했
음이 이번에 새롭게 밝혀졌다.
‘이춘재 진범 특정’은
문제의 끝이 아니라 시작
10차에 걸친 화성연쇄살인사건 수
사과정을 통틀어 적어도 세 명이 극
단적 선택을 했고, 한 명은 조사과정
에서 사망했다. 지금까지는 진범이
특정되지 않아 별다른 문제 제기가
없었지만 범인이 특정된 상황에서 수
사과정에서 피해를 입은 사망자들과
유가족들에 대한 국가 차원의 보상문
제가 자연스레 논의될 것이다.
특히 8차 사건으로 옥살이를 하고
나온 윤모씨의 경우 재심청구 절차가
진행 중이며 많은 관심을 끌고 있다.
당시 수사관들은 “결정적 과학수사
증거가 나온 마당에 굳이 고문을 할
이유가 없었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그러나 결백을 주장하고 있는 윤모
씨가 다리가 불편한 자신에게 쪼그려
뜨리기, 물 안 먹이기, 잠 안 재우기,
자백하지 않으면 사형을 당할 것이며
자백하면 5~6년, 길어도 10년이면 석
방될 수 있다는 회유가 있었다고 주
장하는 점, 현장검증 당시 사람이 넘
어가면 무너질 정도로 허술했던 담의
상태와 윤모씨의 신체 상태로는 담을
넘기 어려워 현장검증에서 담을 넘어
가는 시늉만 했으며 옆에서 형사들이
받쳐주었다는 진술 등을 객관적으로
살펴볼 차례다.
그리고 실종된 화성 초등생의 옷가
지와 가방 등이 발견됐음에도 상식
적으로 살인사건으로밖에 볼 수 없
는 사건을 단순실종사건으로 분류하
고 더 이상 수사를 진행하지 않았던
이유와 결정과정에 누가 어떤 역할을
했는지 여부에 대해서도 짚어야 할
것이다.
오늘날의 경찰이 과거 선배들이 범
했을 가능성이 높은 수사상 문제점이
나 과오를 파헤쳐야 하는 상황이다.
그런 껄끄러움이 있겠지만 경찰의 명
운을 걸고 모든 것이 명명백백하게
밝혀지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