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줌인]난중일기의 현장에서 이순신을 만나다 / 노승석 여해고전연구소장

  • No : 2719
  • 작성자 : 관리자
  • 작성일 : 2019-12-03 13:53:40
  • 분류 : 자유마당

《난중일기》에는 무엇보다 이순
신의 정신과 인간적인 면모,
활약상 등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특
히 눈에 띄는 대목은 전쟁 중에 항시
어머니를 걱정하는 효자로서의 모습
과 혼자만의 사색을 통해 우국충정
을 드러낸 모습이다. 또한 전쟁에 시
달리는 민초들에 대한 연민과 무능한
조정에 대한 탄식, 상관과의 갈등 문
제 등이 서슴없이 드러나 있다.
필자는 최근 몇 년 동안 진행한 《난
중일기》에 나오는 4백여 곳의 유적지
에 대한 답사를 모두 마치고 해당 사
진을 게재한 《난중일기 유적편》을 지
난 10월 출간했다. 오늘날 우리가 이
순신의 백절불굴한 정신을 역사의 현
장에서 배우기 위해서라도 이순신과
관련된 유적지를 현재의 주소에서 확
인하는 작업은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이 글에서는 난중일기의 현장을 둘
러보며 만난 이순신의 면목과 이순신
이 가장 심한 고통과 슬픔을 느끼며
지나간 백의종군로를 소개해 본다.
이순신의 리더십 하나.
솔선수범으로 목적을 이루다
《논어》 자로편에 “공자가 말하기를
자신의 몸이 바르면 명령하지 않아도
행해진다”했다. 대인관계에서 타인의
모범이 되도록 자신부터 바르게 솔선
한다면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자발적
으로 믿고 따르게 되어 계획한 일이
절로 잘 이루어질 것이다. 이것이 바
로 유가(儒家)에서 말하는 이른바 수
기치인(修己治人)의 이론이다. 역사
적으로 보면 훌륭한 위인들은 대부분
이 이론에 충실했다.
이순신(李舜臣·1545~1598년)은 어
떠했을까?
이순신 장군하면 뛰어난 전략과 전
술이 먼저 떠오르지만, 본래는 어려
서부터 유학을 독실이 배운 선비 출
신이다. 그러한 이유로 이순신에게는
보통의 장수에게서 볼 수 없는 남다른
감화력이 있었다. 즉 전쟁 중에 항
시 솔선수범함으로써 부하들도 자발
적으로 동참하도록 한 것이다. 바로
전쟁에서 수기치인의 이론을 실천한
것이다.
이순신이 선봉장으로 나아가 일본
군을 물리친 사례로 당포해전을 들 수
있다. 1592년 5월 29일 이순신은 상황
이 급박해 먼저 출정할 일을 앞당기고
혼자서 전선 23척을 거느리고 우후 이
몽구와 함께 출발했다.
“신은 더욱 분발하여 배를 독촉
하고 선봉에 나아가 곧장 적선을
공격하니, 이에 여러 장수들이 한
꺼번에 철환, 장전, 편전, 화전, 천
지자 총통 등을 비바람 치듯 발사
하여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는데,
왜적들은 중상을 입고 거꾸러진 자
와 질질 끌며 달아난 자가 헤아릴
수 없었습니다” -《임진장초》,‘당포
파왜병장’(唐浦破倭兵狀)-
 
이날 해질녘에 사천의 모자랑포에
거북선을 처음 출동시켜 일본선 13척
을 분멸시켰다. 이때 이순신이 선봉
장으로서 위험을 무릅쓰고 먼저 나아
가자 부하들도 결사적으로 싸웠다.
그 후 일본군이 율포(栗浦, 거제 장목
면)에서 나와 부산으로 도주하려고
할 때 부하들은 역풍이 부는 것을 기
회로 이용해 추격한 결과 마침내 승
리할 수 있었다.
지휘관으로서 이순신은 항상 자기
주도적인 대처능력으로 전쟁에 임했
다. 이는 부하들에게는 사기진작의
효과를 내 통합형의 전술을 구사할
수 있었다. 여기에는 물론 일당백의
용기와 희생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어떠한 위기상황에도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고 전쟁하려는 적극적인 항전
의식에 부하들도 감화되어 막강한 전
투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이는 중국 촉한의 정치가 제갈량이
말한 “용병의 방법이 인화(人和)에 달
렸는데 인화하면 권하지 않아도 스스
로 싸운다”( 《장원》 ‘화인’)는 용병이
론과도 일치한다.
이순신의 리더십 둘.
초심(初心)을 잃지 말라
이순신은 무엇보다 자기관리에 철
저한 사람이었다. 진중에서 항상 근
신하는 선비의 자세로 생활했고 《난
중일기》를 쓰면서 자신을 성찰했다.
그날그날 보고 들었던 일들을 일일
이 적어가면서 잘된 일은 미래를 대
비하는데 밑거름으로 삼고 잘못된 일
은 그와 같은 과오를 범하지 않도록
경계로 삼았다. 이와 같은 철저한 생
활이 거듭되고 축적된 결과, 그 속에서
뛰어난 전략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이순신은 보통 사람이 미칠
수 없는 경지에서 인격과 수양을 갖
춘 전략가로서 아무리 어려운 힘든
전쟁 상황에서도 결코 좌절하지 않고
무장한 강인한 정신은 결사항전의 의
지로 표출됐다. 특히 인간의 도리와
신하의 도리를 다해야 한다는 윤리
적인 명분을 중시했다. 그 결과, 항상
한결같은 마음의 자세를 유지할 수
있었는데. 이순신이 쓴 《송사를 읽고
[讀宋史]》라는 글에서 그러한 내용을
볼 수 있다.
“신하된 자가 임금을 섬김에는
죽음만이 있을 뿐이고 다른 길은
없다. 이러한 때에 종묘사직의 위
태함이 마치 머리털 하나로 3만근
[千鈞]을 끄는 것과 같으니, 신하된
자는 몸을 던져 나라의 은혜를 갚
아야할 것이다”
- 정유년 10월 8일 이후 《교감완역
난중일기》-
 
중국 남송(南宋) 때 이강(李綱)이 그
당시 금(金)나라와 타협하지 말자며
항금(抗金)정책을 주장했으나 반대세
력인 화의파(和議派)에 의해 거절당
하여 마침내 떠날 것을 청하였다. 이
에 대해 이순신은 “신하된 자는 자신
의 주장이 당장 받아들여지지 않을
지라도 우선 그들의 주장에 따라 맞
춰가면서 구국의 계획을 강구해야 한
다”고 했다. 진심으로 나라의 운명을
생각한다면 자신의 뜻이 받아들여지
지 않을지라도 구국의 노력을 포기해
서는 안된다. 당장 해결이 어렵지만,
그렇다고 현실을 도피하기보다는 임
시라도 적극적인 현실참여 속에서 해
결방법을 모색해 나가야 한다. 이순
신은 항상 이러한 자세와 각오로 초
심을 잃지 않고 국난극복을 위해 최
선을 다했다.
난중일기의 현장,
백의종군로를 찾아가다
임진왜란의 7년 기간 중 이순신이
정유년(1597년)에 백의종군한 시기
가 그의 삶에 있어서 가장 힘든 시기
였다. 4월 1일 고니시 유키나가(小西
行長)의 부하 요시라(要時羅)의 모함
으로 감옥살이를 하고 나온 이후부터
아산에서 모친상을 당하고 남행해 6
월 8일 합천에 있는 권율을 만나러 가
기까지 69일 동안은 인간으로서 감내
하기 힘든 최악의 상황이었다. 그러
함에도 이순신은 강한 초극(超克)의
의지로써 좌절하지 않고 맡은 소임을
다하고자 최선을 다했는데, 이때 보
여준 인고(忍苦)의 정신이 위대했다.
4월 1일 이순신이 의금부 감옥을 나
왔는데 현재 종각역 1번 출구 부근에
기념비가 있다. 그 후 과천 인덕원을
지나 4일 오산시 지곶동에 소재하는
독성산성의 아래를 지나고 수탄(水
灘)을 지나 팽성읍 부근에 있는 이낸
손의 집에 유숙했다. 이번에 독성산
성 남장대 아랫길을 확인했고 수탄은
지금까지 밝힌 적이 없었는데, 몇 차
례의 실사 끝에 천안 서북구에 소재
하는 안성천 일대에 있는 군영 나루
터 자리임을 확인했다.
5일 이순신은 아산의 부친인 이정
의 묘소로 가서 참배하고 저녁에 사
당과 장인 장모의 신위에 참배했다.
12일 태안군 근흥면 안흥량에서 온
종 태문이 모친의 안부를 전했다. 13
일 종 순화가 모친의 부음을 전하여
곧장 해암(게바위)으로 달려 나갔는
데, 실제는 모친이 11일 안흥량 선상
에서 이미 사망했다.
15일 모친의 시신을 입관하고 16일
중방포 앞으로 이동하여 영구를 상
여에 싣고 아산의 본가로 돌아와 빈
소를 차렸다. 중방포는 아산시 염치
읍 중방리에 소재하는데, 그 앞의 강
물이 수장골에서 내려오는 강물과 게
바위 앞으로 내려가는 강물과 맞닿는
다. 19일 모친의 영정에 하직을 고하
고 길을 떠났다. 도중에 아산 중곡 감
태기마을에서 강정과 강영수의 조문
을 받고 하마곡(下馬哭)을 했다. 천안
의 보산원에 도착했는데 아들과 조카
들이 배웅했다. 이날까지 이순신이
아산에 머문 기간은 15일인데 가장
처절한 아픔을 느꼈다.
그 후 이산(논산)과 여산(익산), 전
주와 오원역, 임실, 남원, 운봉, 구례
를 지나 순천 송치에 도착했다. 5월 2
일 순천부의 빈 동헌에 앉아 비통해
하였는데, 현재 순천부동헌터에 있
는 5백여 년 된 푸조나무를 찾았다.
이순신은 12일 동안 순천부에 머물면
서 원균의 비행을 많이 전해들었다. 6
월 2일 삼가현으로 가는데 5리밖 괴
정(홰나무정자)에서 노일을 만났는데
이 괴정이 삼가면에 현재 남아 있다.
3일 비가 와서 삼가에 계속 머물고 고
을사람들에게 밥을 얻어먹은 종들에
게 매질하고 먹은 쌀을 되돌려주게
했다. 전란 중에 백성들에게 민폐를
끼치는 일을 경계한 것이다.
4일 합천 관아에서 4km 떨어진 곳
에 괴목정이 있어 아침을 먹었다. 괴
목정의 위치는 합천 대양면에서 정확
한 위치를 찾았다.
40여 년 전 이곳에 4백여 년 된 홰
화나무가 있었다. 여기서 합천군까지
4km이고 2km를 더 가면 합천군과 초
계로 가는 두 갈림길이 있다. 이 갈림
길에서 4km를 가니 멀리 적포뜰에 있
는 권율 진영의 수(帥)자 기(旗)가 보
였다. 권율은 율곡면 영전리에 1593
년 12월 25일부터 병영을 설치했다.
이 병영 맞은편에 이순신이 농사지은
논과 무밭터가 지금도 남아 있다. 여
기서 8km지점 백마산성 아래 권율이
군사 수백 명을 훈련시킨 습전곡이
있었다. 그후 개비리를 지나 모여곡
의 이어해의 집에서 기거하다가 8일
원수의 진영에서 권율을 만나 복병
파견에 대한 공문을 보고 작전업무를
도왔다.
왜 다시 이순신인가
이순신은 출옥한 후 선조의 명을 따
라 백의종군하여 권율의 진영으로 들
어가 작전임무를 수행했다. 삼도수군
통제사직을 잃고 27일간 억울한 옥살
이를 하고 나와 백의종군하는 중에
아산에서 모친상까지 당한 악순환의
상황에서 뼈절인 아픔을 느끼면서도
결코 좌절하지 않고 주어진 사명을
다한 것이다.
개인의 희생적인 노력으로 최악의
고통을 감내하며 위기를 기회로 승화
시킨 이순신의 백절불굴의 정신은 쉽
게 포기하는 경향이 있는 현대인들에
게 큰 귀감이 되어 준다. 또한 목적을
달성하기까지 보여준 솔선수범의 자
세는 주변사람들로부터 지지와 신망
을 얻게 함으로써 삶에 큰 힘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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