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역이라는 단어는 전쟁이라는 수식어가 자주
따라붙는다. 단순한 수요와 공급의 논리를 넘
어 인종이나 역사론, 종교 같은 국가적 어젠다의 영
향을 받기 때문이다. 현대사회에 접어들어 국가 간
교역이 활발해지면서 무역은 점점 더 강력한 전쟁
무기가 됐다.
지난해 7월 대한민국은 한 차례 무역을 무기로 내
세운 전쟁을 겪었다. 7월 1일 일본 경제산업성이 반
도체 및 디스플레이 제조 핵심 소재의 수출을 제한
하기로 발표하며 선전포고의 총성이 울렸다. 한 달
뒤인 8월 2일 일본 정부는 대한민국을 백색국가에서
제외하기로 했다.
이에 문재인 대통령은 긴급 국무회의를 통해 해당
조치에 대해 깊은 유감을 표시했고, 단호한 상응 조
치를 하겠다고 밝혔다. 이후, 우리도 일본을 백색국
가에서 제외하기로 결정했다.
대한민국은 공포에 빠졌다. 일본이 수출 금지를 한
3대 품목이 반도체 생산에 필수로 들어가는 소재였
기 때문이다. 반도체는 한국 산업의 대부분을 차지
하는 ‘급소’나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미국의 투자은
행 모건스탠리는 무역갈등 직후 “한일 간 무역이슈
가 국내외 어려움에 처한 한국 경제에 추가 하방 압
력이 될 수 있다”며 올해 한국 경제성장률 전망치를
종전의 2.2%에서 1.8%로 낮추기도 했다.
이후 반년간의 치열한 공방을 거치며 한국은 3대 수
출금지 품목을 포함해 일본 의존도가 높은 소재·부
품·장비 일명 소부장을 자립화해왔다. ‘6개월도 버티
지 못할 것’이라는 우려는 일단 현실이 되지 않았다.
정부의 ‘소부장 경쟁력 강화 대책’
산업통상자원부에 따르면 정부는 지난해 8월 ‘소
재·부품·장비 경쟁력 강화대책’을 내놓은 이후 일본
이 수출 규제한 3개 품목을 포함해 20개 핵심 소재
부품의 국산화와 조달처 다변화를 추진 중이다. 소·
부·장 경쟁력 강화에만 매년 1조 원 이상의 예산을
투입하고 있으며, 민·관이 적극적인 공조 대응에 나
서면서 일본의 수입규제 조치 후 불과 6개월 만에 3
개 규제 품목 공급 안정화 등 가시적 성과를 내놓고
있다.
우선 지난해 7월 일본이 수출을 규제한 반도체·디
스플레이 3개 품목(고순도 불화수소·포토레지스트·
플루오린 폴리이미드)은 국산화·수입 다변화로 공
급 안정화를 진전시켰다.
이 가운데 액체 불화수소(불산액)는 공장 신·증설
로 국내 생산 능력을 두 배 이상 키웠고, 제3국 제품
도 시험을 거쳐 실제 생산에 투입 중이다. 기체 불화
수소(에칭가스)는 지난해 말 신규공장 완공과 시제
품 생산으로 국내생산 기반을 확보하는 한편, 미국
산 제품 수입도 병행하고 있다.
포토레지스트는 유럽산 등 제품을 테스트 중이며
특히 미국기업(듀폰) 투자 유치와 자체 기술개발로
국내 공급기반을 강화하고 있다. 플루오린 폴리이미
드도 지난해 말 신규공장 완공 후 시제품을 생산 중
이다. 산업부 측은 “구체적 진도율까지 공개하긴 어
렵지만 3대 품목 자립은 가까운 시일 안에 실현 가능
한 수준에 도달했다”라고 설명했다.
日 수출규제, 오히려 긍정적 모멘텀 돼
각종 지표에서도 일본의 수출규제 조치가 우리
경제·산업에 미치는 영향이 제한적이고, 오히려
긍정적 모멘텀으로 작용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산업부의 교역 동향 자료를 보더라도 지난
해 대일(對日) 무역수지 적자는 191억5000만 달러
로 2003년 이후 16년 만에 최저 수준을 기록하는
등 무역 불균형 개선에 도움이 됐다.
지난해 외국인 직접투자(FDI) 실적은 소·부·장
분야에서 핵심 소재공급 안정화와 국산화에 기여
하는 우수 프로젝트가 연이어 성사되면서 신고
금액 기준 233억 달러로 역대 2위를 기록함과 동
시에 5년 연속 200억 달러 이상 유치 성과를 이뤘
다. 산업부 관계자는 “지난 6개월간 3대 규제 품목
등에 대한 확실한 수급 안정 기반이 구축됐으며,
소·부·장 산업 경쟁력 강화, 거래선 다변화 등 대
일의존도를 낮추는 성과를 보인다”고 평가했다.
지속가능한 소부장 산업 생태계 조건
하지만 긍정적 지표에도 불구하고 아직 소부장 자
립화 성공이라는 샴페인을 터트리기는 지나치게 이
르다. 일본이 규제를 전면적으로 걷어내고 다시 주요
수출 주요 제품들을 공급한다면 아직 생산 초기 단계
인 대체 제품들의 경쟁력은 크게 떨어질 우려가 있다.
일본 제품들과의 경쟁을 이기지 못하고 자립에 실패
한다면 정부가 쏟아부은 수조 단위의 막대한 예산은
그대로 매몰된다. 또 한 번 산업이 꺾이는 전례가 남
는다면 향후 언제든 제2, 제3의 무역전쟁이 발발하게
됐을 때 상대국에 끌려다니게 될 공산이 크다.
이를 막기 위해서는 예산을 통해 반짝 효과를 내는
산업이 아니라 지속가능한 산업 생태계가 조성돼야
한다.
1. 규제의 완화
가장 먼저 시급한 것은 옭아맸
던 규제의 완화다. 정부는 화학물
질에 대한 인허가 기간을 단축하
고, 주 52시간 근무제 역시 특별
연장근로를 인정하는 대책을 내놨
다. 환경부, 고용부 등 여러 부처
를 거쳐야 하는 복잡한 인허가 절
차를 줄인 ‘패스트트랙(신속처리)
제도’도 도입했다.
보다 더 중장기적인 기틀 마련
을 위해 관련 규제를 일원화한 법
도 시행된다. 일본의 수출규제를
계기로 국내 소재·부품·장비 산
업을 육성하기 위해 대상, 범위,
기능, 방식, 체계 등을 20년 만에
전면 개편한 이 특별법은 4월 1일
부터 시행될 예정이다.
개정안에는 ▲산업 전반의 경
쟁력 강화 ▲‘소재·부품’을 ‘소재·
부품 + 장비’로 확대 ▲R&D, 인력
양성, 테스트베드, 특화단지 등 지
원 ▲수요-공급기업 간 협력모델
에 금융, 입지, 규제 특례 등 지원
▲경쟁력 강화위원회 신설 및 특
별회계 운영(체계) 등으로 이뤄져
있다. 특히 수요·공급기업 간 협
력 시 자금을 지원하고 규제 특례
를 적용한다. 예컨대 삼성전자가
구매 목적으로 중소기업 A사와 공
동 기술개발 시 여기에 투입되는
자금 일부를 보조받을 수 있게 된
다. 또 특별법을 근거로 기술개발
과 생산을 연계하기 위해 15개 공
공연구소·나노팹 등 테스트베드
를 대폭 확충(2020년 1500억원)하
고, 연구개발(R&D) 지원체계 구축
을 위해 국가연구인프라(3N)를 단
계적으로 확대한다.
2. 소부장 산업 인재 육성
둘째는 인재풀의 구축이다. 업
계에서는 바로 현장에 투입해 활
용할 수 있는 인력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정부는 이 같은 지적
을 받아들여 올해 3월 전국 3개 대
학에 신설되는 상생형 계약학과
등을 통해 소부장 인력양성을 지
원할 예정이다. 대기업이 협력업
체(중소기업) 직원들의 교육 수요
를 파악하고, 대학과 공동 커리큘
럼을 구성하는 방식으로 운영된다.
소재·부품 분야는 경희대학교
와 삼성전자가, 수소차 부문은 수
원대학교와 현대자동차(현대차)
가, 커넥티드카 분야는 대구대학
교와 KT가 손을 잡는다. 한 학과
당 정원은 15~20명 수준이다.
우수 인력 유치를 위한 인센티
브도 마련됐다. 정부는 기업이 소
부장 관련 연구인력을 채용할 경
우 최대 3년간 인건비의 50%를,
공공 연구기관의 전문인력이 기업
에 파견되면 최대 6년간 인건비의
50%를 지원할 예정이다.
전자, 화학, 통신공학 등 10
개 소부장 직종의 해외전문인력
(E-7)이 국내 취업할 때 전자비자
등 패스트트랙을 적용하는 한편
소득세를 5년간 최대 70%까지 공
제해준다.
이 같은 대학과 기업 간의 연계
를 통해 인재를 수급하는 것은 청
년 취업난 해소에도 기여하며 동
시에 기업엔 필요한 인재를 연계
시켜주는 ‘윈윈 전략’이다. 이번 3
개 대학을 시발점으로 특히 지역
에 위치한 대학들과 기업을 연결
해주는 정책이 필요하다.
권역별로 설치될 계획인 마이스
터 대학교도 좋은 소부장 인재 육
성 플랫폼이다. 마이스터 대학은 6
개월 이상 단기직업교육 과정부터
2년 전문학사, 2년 추가 전공심화
과정 학사, 2년 석사로 구성된다.
학생은 총 6년 과정을 통해 전문기
술석사로 성장할 수 있다. 학사와
석사는 일정 기간 산업체 경력을
필수로 한다. 단기 과정이나 전문
학사 과정 수료 후 산업계에서 일
하다 다시 교육받고 학사가 된 후
또 경력을 채워 전문 기술 석사로
성장하는 모델이다. 산업체 경험
과 이론까지 갖춘 고숙련 실무형
전문기술 인재로의 경력 발전 과
정을 제시한다. 2021년 권역별로
약 2개 대학을 선정해 시범 운영한
후 2023년까지 제도 정비를 통해
확산시킬 계획이다.
3. 부처 간 협업 이끌 컨트롤타워
마지막으로 이를 총괄해나갈 컨
트롤타워가 필요하다. 정부는 소
부장 경쟁력 강화를 위한 전방위
적 지원을 위해 소부장 경쟁력위
원회를 소부장 컨트롤타워로 운용
하고, 부처 간 협업체계를 고도화
하는 중이다.
예컨대 수급대응지원센터를 기
업애로, 규제개선 등 상시 접수창
구로 운용하고, 경쟁력위원회를
중심으로 부처 간 협업을 통해 적
극 검토·개선해나갈 계획이다. 다
만 이 소부장 위원회에 실제 현장
목소리를 충분하게 들려줄 기업인
들이 부족한 점은 아쉽다. 소부장
경쟁력 위원회 시행령에 따르면
위원회는 정부 인사뿐 아니라 민
간위원도 포함한다.
현장의 목소리를 반영하겠다는
의지에서다. 민간위원은 ▲경제
관련 단체장이나 연구기관장 ▲소
부장 수요·공급 기업 대표 ▲소부
장 산업에 대한 학식과 경험이 풍
부한 사람 중에서 위원장이 위촉
한다.
현재 확정된 민간위원 14명 가
운데 소부장 수요·공급 기업 대표
는 없다. 황철주 주성엔지니어링
대표, 강호갑 신영(금속) 대표이사
회장이 속했지만, 기업 대표가 아
닌 각각 대중소상생협의회 회장과
중견기업연합회 회장 자격으로 포
함됐다.
아직은 샴페인 터트리기 일러
소부장 자립화 6개월을 맞은 지금 일본은 당황한 모
양새다. 아사히 신문은 1월 21일 한국 반도체 소재기
업인 솔브레인이 초고순도(99.9999999999%) 액체 불
화수소를 대량 생산하는 데 성공한 사례를 언급하며
“과거 한국 정부의 국산화 노력은 결실을 거두지 못
했으나, 민·관이 합동해 초고속으로 대책을 실현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제는 기세를 몰아야 할 때다. 지
속가능한 소부장 생태계 산업 구축 사례를 통해 무역
전쟁에 휘둘리지 않는 국력을 보여줘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