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년 만에 찾아온 인플레이션 ‘살아남기’
윤석열 정부 ‘물가 잡기’ 총력전해야
정태선(뉴스핌 공공정책부장)
40년 만에 찾아온 인플레이션의 역습에 시장이 혼란스럽다. 물가상승과 경기침체에 대한 우려로 불안이 점점 커지고 있다. ‘포스트 코로나’에 대한 기대감은 단번에 무너져 내리고 있다.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한 빠르고 강한 인플레이션이 우리 생활 깊숙한 곳까지 다가왔다. 돈의 가치가 바닥을 모르고 떨어져 우선 장바구니 물가가 비상이다. 장을 보기 위해 집 앞 마트를 나가기가 무서울 지경이다.
달걀과 우유, 채소나 간식을 조금만 담아도 10만 원이 훌쩍 넘어가고, 고기라도 사려고 하면 20만 원을 훌쩍 넘겨버린다. 직장인들 단골 회식 메뉴인 삼겹살은 ‘금(金)겹살’이다. 두세 명이 소주 한 잔만 걸쳐도 10만 원으로는 모자란다. 그야말로 밥상, 외식 물가가 고공행진이다. 다른 물가도 마찬가지다. 최근 물가상승의 쓰나미는 먹거리에서 공산품에 이르기까지 전방위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기름값은 정부가 세율을 낮춰줬는데도 리터당 2000원대를 넘어섰다. 중형차에 기름을 채우면 10만 원 가량이 든다. 먹고 입고, 어딜 다니기만 해도 돈이 줄줄이 빠져나간다는 것을 절실히 체감하게 한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팬데믹 상황이 한창일 때가 오히려 살기는 좋았다는 이들까지 나온다. 부동산도 오르고, 주가도 오르고, 금리도 낮았고 물가가 안정됐던 그때가 말이다.
지구촌 뒤흔드는 초인플레이션… ‘물가공포’
최근 한국은행이 발표한 5월 소비자동향조사에 따르면 기대 인플레이션율은 3.3%다. 지난달보다 0.2%p 올랐다. 이는 9년 7개월 만에 가장 높은 수치다. 기대 인플레이션율은 앞으로 1년 동안 소비자물가 상승률에 대한 경제 주체들의 전망치다. 물가는 계속 오를 것이라는 전망이 한국 사회를 뒤덮고 있는 것이다. 결국 중앙은행은 정책금리(기준금리)를 올려 치솟는 물가를 잡으려고 하고 있다. 경제 주체들의 기대 인플레이션을 낮추기 위해 금리를 올릴 수밖에 없는 처지다.
문제는 이런 고인플레이션이 우리나라에만 국한된 게 아니라는 점이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촌은 온통 물가 공포에 빠져있다. OECD(경제협력개발기구)에 따르면 38개 회원국의 4월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평균 9.2%다. 미국은 5월 소비자물가상승률이 8.6%로 41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고 영국과 프랑스, 독일 등 유럽국가들도 초인플레이션에 신음하고 있다. 경제구조가 취약한 신흥국들도 물가상승에 고통받는 건 마찬가지다. 터키와 카자흐스탄, 스리랑카는 물론 일부 중남미 지역도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정권교체의 목소리와 각종 시위에 몸살을 앓는 등 국가적 대혼란을 겪고 있다. 무엇보다 세계 최강대국 미국이 좀처럼 잡히지 않는 인플레이션 때문에 초조해하는 모습이 눈에 띈다. 물가를 잡지 못한 조 바이든 대통령은 40%대의 지지율에 머물러 11월 중간선거 패배 위기에 휩싸여 있다. 다급한 바이든은 유가를 잡기 위해 사우디아라비아 방문을 계획하고 중국산 제품에 부과하는 관세도 일부 폐지를 검토하는 등 백
방으로 노력하고 있지만 뒤늦은 감이 있다.
미 연방준비제도(Fed·연준)는 지난 6월 15일(미국 현지시각) 이례적으로 기준금리를 75bp 인상하는 ‘자이언트 스텝’을 단행했다. 경제 성장에 일부 손상이 가더라도 물가만큼은 최우선으로 잡겠다는 뜻이다. 이례적인 금리인상에도 불구하고 빅스텝(0.5%), 자이언트스텝(0.75%) 금리 인상 얘기가 계속되면서 투자자들은 불안에 떨고 있다. 제롬 파월 미 연준 의장은 “우리는 금융 여건이 적절한 수준이고 물가상승률이 내려갔다고 느낄 때까지 계속 나아갈 것”이라며 통화긴축을 늦추지 않겠다는 의지를 강력하게 피력하고 있다. 그러나 인플레이션이 언제 잡힐지, 과연 잡힐 수는 있는지 알 수 없는 상황이다.
미국의 지난 3월 중 소비자물가(CPI)는 작년 같은 기간보다 무려 8.5%나 올랐다. 이는 1981년 12월 이래 가장 큰 폭의 상승이다. 물가가 오르자 임금도 덩달아 올랐는데, 4월 중 임금은 1년 전보다 6% 올라 1983년 관련 통계가 작성된 이후 가장 높은 오름폭을 기록했다. 4월 중 CPI는 작년 같은 기간보다 8.3% 올라 3월에 비해서는 다소 떨어졌지만 시장전문가들이 예상
했던 8.1%를 웃돌아 불안심리는 여전히 가라앉지 않고 있다. 아울러 4월 중 임금도 1년 전보다 6.0% 상승해 1983년 관련 통계를 작성한 이래 가장 높은 수준을 기록했다. 결국 코로나 팬데믹이 불러온 후유증은 경제에 상당 기간 악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상된다.
미 구인난 → 임금인상, 인플레 심화… ‘악순환 늪’
지금의 인플레이션은 복합적이다. 미국은 코로나19 상황에서 과도한 돈 풀기와 성장에 방점을 두고 물가상승을 좌시했다. 또 델타와 오미크론 변이 바이러스로 인한 불안감에 공급망은 무너졌고, 생계지원과 자산 가격 상승으로 일터를 떠난 근로자들이 복귀하지 않으면서 임금은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여기에 수요를 따라가지 못하는 생산 등이 얽혀 ‘대 인플레이션의 시대’였던 1970년대 이후 최악의 인플레이션을 겪고 있다는 분석이다.
간단히 말하면 글로벌 공급망 훼손과 우크라이나 전쟁을 인플레이션 주범으로 꼽는다. 여기에 미국 내부적 요인을 꼽는다면 최근 기록적인 인플레이션에는 구인난이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는 지적에 무게가 실린다. 구직자보다 구인건수가 훨씬 많은 상황에서 기업들은 기존 인력이 이탈하는 것을 막고, 새로 필요한 인력을 확보하기 위해 임금을 인상할 수밖에 없다. 이것이 결과적으로 인플레이션을 더 심화시켜 악순환의 고리를 형성하고 있다는 것. “기업들은 인플
레이션을 핑계로 가격을 올리려고 하겠지만 가격이 올라가면 결국 다시 임금인상 압박을 받을 수밖에 없고, 이는 또 다른 인플레이션을 촉발시켜 악순환의 고리에서 탈출하지 못할 것이다. 결국 조기에 물가가 잡히지 않으면 악순환은 계속해서 이어질 수밖에 없어 보인다.” 현재 상황을 바라보는 미국 기업들의 분위기다.
미국 피자전문점 파파존스의 경우 도미노피자나 피자헛과 다르게 발 빠르게 프리미엄 제품에 대한 가격인상을 통해 일자리 대란을 타개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CNN에 따르면 로버트 린치 파파존스 CEO는 지난 1분기 실적 발표에서 “파파존스가 직면한 인력난의 해결책은 가격 전략”이라며 “프리미엄 포지셔닝에 따른 가격 설정은 상대적으로 인력 문제의 영향을 덜 받는다”고 말했다. 가격인상을 통해 구인난을 정면돌파하겠다는 것. 필요한 인력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임금인상이 불가피한데, 임금인상분을 보전하려면 결국은 가격인상을 통해 매출을 늘려 임금인상을 보존하는 수밖에 없다는 논리다. 구인난에 따른 임금인상과 그로 인한 제품가격 인상은 결과적으로 또 다른 인플레이션을 촉발시켜 긴축공포를 악화시키는 ‘악순환의 늪’을 만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돌아오지 않는 미 핵심근로층 육아 부담·가치관도 변화
문제는 핵심 노동자층의 업무 복귀가 앞으로도 더딘 속도를 보일 가능성이 크다는 전망이다. 그간 노동참여의 핵심 요인으로 꼽혔던 임금 상승이 코로나19 시국에는 영향력을 크게 발휘하지 못한 데다 육아 등으로 인해 여성 인력의 업무 복귀 시점이 늦어지는 등 다양한 요인이 얽혀 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작년 10월 기준 미국 노동 참여율은 61.6%를 기록했다. 이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가 시작할 당시와 비교하면 회복한 것이긴 하나, 코로나19가 미국 경제를 강타하기 직전인 지난해 2월(63.3%)을 여전히 밑도는 수준이다.
노동참여율은 전체 노동인력 풀에서 일하는 사람과 구직 중인 사람의 비율을 뜻한다. 주목할 만한 점은 한창 일할 핵심생산인구인 25~54세 노동자층의 일터 복귀가 상당히 더디다는 점이다. 노동부에 따르면 25~54세의 노동 참여율은 10월 기준 81.7%로 2020년 2월(82.9%)보다 낮은 수준을 보였다. 사실상 코로나19 이전 수준을 회복하지 못한 것이다. 인원으로 따지면 팬데믹(전염병 대유행) 이전보다 노동시장 참여 인구가 140만 명 줄어든 셈이다.
실제로 코로나19 백신 접종 확대와 방역 정책 완화 등으로 학교를 다시 개방하고 여성들의 육아에 대한 부담은 팬데믹이 한창일 때보다 상대적으로 줄었지만, 이로 인해 여성들의 업무 복귀가 크게 확대되지 않고 있다.
미국 노동부에 따르면 지난해 10월 25~54세 여성의 노동 참여율은 75.4%로, 2020년 2월 수준(76.8%)을 회복하지 못했다. 백신 접종 대상이 5세 이상으로 확대됐지만 많은 부모가 백신 부작용 등을 이유로 아이들의 접종을 꺼리거나, 5세 미만의 아이들은 접종 대상에서 여전히 제외돼 이들 부모의 노동시장 복귀가 늦어지고 있다고 분석했다. 아울러 팬데믹 기간 삶의 가치관이 바뀐 사람들이 늘어났다는 점도 노동 참여 지연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지적이다.
브루킹스연구소 경제학자인 스테파니 아론슨은 “사람들이 1년 반 동안 그들의 삶의 방식을 완전히 바꿨는데, 이는 곧 사람들의 노동 측면 결정에 있어서 평소보다 더 버티는 힘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 같다”고 설명했다. 문제는 노동자들의 업무 복귀 지연이 장기화하면서 공급망 혼란이 가중되고 있다는 것이다. 구인난에 시달리는 회사들이 임금을 올리면 생산 단가가 올라가고, 이는 곧 소비자 물가 상승으로 이어져 미국 경제 위협 요소가 되고 있는 것이다.
원가·현금 압박, 정부 물가 잡는 데 총력 기울여야
우리나라 경제 상황은 미국보다 더 심각하다. 물가뿐만 아니라 고환율, 고유가의 태풍 속 한가운데 있다. 대통령과 경제사령탑의 입에서 ‘경제태풍’, ‘경제위기’ ‘경제전쟁’이라는 말이 날마다 등장한다. 한국은행은 물가상승 목표치를 제시하지 않고 물가상승 전망치만 내놓고 있다. 2.0%(지난해 11월)→3.1%(2월)→4.5%(5월)로 계속 올리고 있을 뿐이다.
지난 금융위기 이후 세계에 엄청난 양의 돈이 풀렸음에도 인플레이션이 일어나지 않은 것은 중국과 러시아가 값싸게 소비재와 원자재를 공급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중국과 러시아가 세계 경제에서 반쯤 떨어져 나갔고, 원가 상승압력이 거세다. 미중 갈등은 깊어지고 있고, 우크라이나에서 휴전이 이뤄져도 러시아가 돈바스 지역을 내놓지 않는 한 서방의 경제 제재는 이어질 수밖에 없다.
지금 인플레이션에는 현금 압력(cash push)과 원가 압력(cost push)이 동시에 작용하고 있다는 데 그 심각성이 있다. 현금 압력 인플레이션은 금리 인상으로 대응해야 하지만 원가 압력 인플레이션은 정부가 직접 가격을 규제하거나 세금을 내리는 방법으로 대응하는 수밖에 없다.
정부는 물가 안정과 경제 활성화라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는 한가한 얘기를 할 때가 아니다. 물가를 잡는 데 총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역사에 영원한 제국은 없다. 찬란한 전성기를 누리며 흥했던 나라도 시간이 흐르면 결국 망한다. 겉으로 드러난 패망원인은 외적의 침입이지만 사실 출발은 내부 경제 시스템의 균열 때문인 경우가 많다. 살인적인 인플레이션 때문에 멸망한 나라는 역사 속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스파르타와 패권전쟁을 치르다 재정적자가 쌓이고 화폐에 대한 신뢰가 무너져 몰락의 길을 간 아테네가 대표적 예이다. 네로황제 시대부터 재정 부족 문제가 불거진 로마제국도 결국 화폐를 찍어내다가 초인플레이션을 겪으며 붕괴됐다. 1차 세계대전 이후 성립된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도 통화팽창 정책을 잘못 썼다가 마르크화 가치 폭락을 맞으며 붕괴됐다.
전쟁 다음으로 국민의 재산을 위협하는 것이 인플레이션이다. 물가가 10% 오르면 연봉 5000만 원 월급쟁이는 500만 원을 빼앗기는 셈이다. 정부가 가진 돈을 빼앗지는 말아야 한다. 정책당국이 신뢰를 잃지 말고 실기하지 않기를 바란다. 인플레이션을 안일하게 보고 대응하다가 큰 곤욕을 치르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