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로 치닫는 양안관계와 미·중 갈등
동아시아 긴장 고조로 한반도에도 악영향
최익재(중앙일보 기자)
미국의 권력 서열 3위인 낸시 펠로시 하원의장의 대만 방문에 따른 후폭풍이 거세다. 동아시
아의 국제정치 지형이 더욱 거칠어진 모양새다. 미국과 중국의 대립은 더욱 심화됐고, 주변국들은 양국을 중심으로 결집하고 있다. 대만이 동아시아의 화약고이자 미·중 갈등의 핵이 된 셈이다.
지난 8월 2일 펠로시 의장은 중국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대만을 찾았다. 이에 맞서 중국은 이전과는 다른 강력한 군사적 대응 카드를 꺼냈다. 대만을 전면적으로 봉쇄하는 군사훈련을 벌였고, 이는 대만 침공 시나리오의 일부라는 평가까지 나왔다. 중국 전투기들은 기존의 레드 라인이었던 대만 방공식별구역(ADIZ) 침범뿐만 아니라 대만해협의 중간선까지 넘었다. 중국의 둥펑 미사일은 대만 상공을 지나 동부 해안에 떨어졌다. 유사시 미군의 지원을 염두에 둔 훈련이었다.
대만을 둘러싼 긴장 고조는 지금도 진행형이다. 지난 8월 14일에도 미 의회 대표단이 대만을 찾았다. 상원 외교위원회 동아태 소위 위원장인 에드 마키 의원을 포함한 5명의 민주·공화당 의원들이 인도·태평양 지역 순방 일환으로 대만을 방문한 것이다. 중국 정부는 “미국 정치인들이 대만 독립이라는 잘못된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고 강하게 반발했다. 하지만 미국의 고위급 인사의 대만 방문은 끊이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대만 문제가 쉽게 해결되지 않을 것이란 관측이 설득력을 얻는 이유다.
미국의 대중 견제에 대만 역할 커져
사실 미국과 대만 관계는 순탄치만은 않았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부침의 연속이었다. 1949년 미국은 중국이 아닌 대만을 공식 정부로 인정했다. 중국 공산당을 견제하기 위해 국민당을 이끌다가 대만으로 쫓겨난 장제스와 협력한 것이다. 하지만 1971년 대만이 보유했던 유엔 회원국 지위는 중국으로 넘어갔고, 1979년에는 미국이 중국과 수교를 하면서 대만과의 외교 관계는 끊겼다.
이때 지미 카터 미국 행정부는 중국 정부가 주장하는 ‘하나의 중국’ 원칙을 수용했다. 대만이 독립된 국가가 아니라 중국 영토의 일부라는 주장이었다. 그러면서도 미 정부는 ‘대만 관계법’을 제정해 대만이 중국의 위협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킬 수 있도록 무기 등 국방 물자를 제공할 수 있는 법적 기반을 마련했다. 현재 양국은 공식적으로 대사관을 두고 있지 않지만 주대만미국협회(AIT)와 대만경제문화대표부(TECRO)를 통해 관련 업무를 처리하고 있다. 이처럼 미국 정부는 대만을 인정하지 않으면서도 안보 차원에서는 지원을 끊지 않고 있다. 국제사회는 이런 미국의 어정쩡한 태도를 ‘전략적 모호성(strategic ambiguity)’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이런 미국의 태도도 중국과의 경쟁이 심화되면서 조금씩 바뀌고 있다. 조 바이든 대통령은 지난해 1월 취임 이후 “중국이 침공할 경우 대만을 돕겠다”는 발언을 세 차례나 했다. 이전 미 정부가 내세웠던 시인도 부인도 하지 않았던 것과는 사뭇 다른 입장이다. 그만큼 중국을 견제하는데 있어 대만의 효용이 커졌다는 의미다.
미국-대만 협력 강화에 중국 반발 거세
이에 대한 중국의 반발은 거세다. 중국 정부는 군사력을 동원한 대만 봉쇄뿐만 아니라 대만 제품 수입 금지 등 경제 보복 조치도 내놓았다. 특히 대만 봉쇄는 대만의 영해와 영공을 인정하지 않고 주권을 무시하는 군사적 조치로 볼 수 있다. 중국 매체인 환구시보는 “대만의 주요 항구와 항로를 차단해 전면 봉쇄하는 것은 무력 통일 옵션의 하나”라고 분석했다.
이런 중국의 무력시위는 대만이 중국의 영토라는 점을 국제사회에 강하게 인식시키겠다는 의도로 풀이된다. 또 대만이 내년에 지방자치단체 선거와 2024년 총통·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있는 만큼 긴장 고조를 통해 집권 민진당에 불리한 정세를 조성하려는 전략도 엿보인다. 민진당의 차이잉원 정부가 반 중국 및 강한 독립 성향을 보이면서 친미적인 행보를 이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과 대만의 관계를 의미하는 양안관계는 역사적으로 대만의 국내 정세에 큰 영향을 받았다. 친 대륙 성향의 국민당과 대만의 독립성을 강조하는 민진당 중 누가 정권을 잡느냐에 따라 대 중국정책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1949~1975년 장제스 정부가 대만을 통치했던 시기엔 중국과 접촉·협상·대화를 하지 않겠다는 ‘3불 정책’이 유지돼 양안관계는 대립의 연속이었다. 특히 대만과 중국 사이에 있는 금문도 등을 둘러싸고 군사적 충돌 위기까지 치달았다. 1차 대만해협 위기는 1954년에 발생했다. 미국의 함대가 대만해협에서 철수하고 미국과 대만 간 방위조약 체결이 추진되는 과정에서 중국이 금문도를 포격한 것이다.
결국 이런 중국의 군사적 행동은 당초 대만 본토만을 대상으로 했던 방위조약 범위를 부속 섬들까지로 확대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2차 대만해협 위기는 1958년에 금문도에 대한 공격으로 일어났지만 미 함정이 파견으로 종식된다.
대만의 정권 교체에 따라 대 중국 정책 바꿔
장제스가 사망한 후 들어선 국민당의 장징궈 정부(1975~1988년)는 ‘3불 정책’의 변화를 꾀한다. 중국이 1978년 개혁·개방정책을 내세움에 따라 중국 본토와의 완전한 단절보다는 교류가 대만 발전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생각에서다. 중국의 대만 통일정책도 무력에 의한 통일이 아닌 ‘일국양제’로 변했다. 대만을 ‘특별자치구’를 지정해 고도의 자치권을 주는 내용이다.
장징궈 정권 말기 후계자로 지목된 리덩후이의 등장으로 양안관계는 크게 변하기 시작한다. 그가 대만 출신인 만큼 대만 독립이 크게 강조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후 국민당의 리덩후이 정부(1988~2000년)에서 양안관계는 크게 악화됐다. 급기야 1995년에는 리덩후이의 미국 방문으로 인해 3차 대만해협 위기가 발생했다. 중국이 대만해협에서 군사훈련을 하면서 미사일 등을 발사하는 등 대만을 위협한 것이다.
리덩후이는 원래 국민당 주류와는 다른 중국관을 갖고 있었고 결국 그의 집권 기간 중 ‘양국론’이 구체화된다. 1986년 대만 출신들이 창당한 민진당도 1992년 입법원 선거에서 총 161석 중 50석을 차지하면서 제1야당으로 등장했다.
2000년 총통 선거에서는 야당인 민진당이 승리해 천수이볜 정부(2000~2008년)가 들어선다. 대만 최초의 정권교체였다. 천수이볜 역시 대만 출신으로 독립 성향이 강해 양안관계는 더욱 악화된다. 그는 대만해협을 두고 각각의 나라가 존재한다는 ‘일변일국론’을 내세웠다. 이에 맞서 중국은 ‘반분열국가법’을 제정해 무력 통일을 법적 근거를 마련했다. 천수이볜은 결국 부패 스캔들로 몰락했고 2008년 총통 선거에서는 국민당의 마잉주가 승리하게 된다. 마잉주 정권(2008~2016년)은 중국과의 교류 협력 확대를 통한 양안관계 회복을 추진했다. 2015년에는 첫 양안 정상회담이 열리기도 했다. 하지만 중국과의 교류를 통해 발생한 이익이 대기업에 쏠리자 젊은 층은 이에 반발했고 다시 정권 교체가 이뤄진다.
이렇게 등장한 민진당의 차이잉원 정부(2016~현재)는 급진적인 대만 독립을 지양할 뿐만 아니라 ‘하나의 중국’ ‘일국양제’도 거부했다. 중국에 대한 경제적 의존을 줄이고 미국·일본과의 협력을 강화를 꾀했지만 경제 부진으로 재선에 위기를 맞는다. 하지만 홍콩사태 발생으로 반 중국 정서가 크게 확산됨에 따라 2020년 재선에 극적으로 성공해 지금까지 대만을 이끌고 있다.
양안 관계에는 중국과 대만 관계 외에도 미·중의 국내 정치와 여론이 작지 않을 영향을 미친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오는 10월로 예정된 제20차 공산당 전국대표대회에서 ‘3연임’ 확정을 기대하고 있다. 이를 위해선 ‘하나의 중국’이라는 원칙하에 대만 통일에 대한 확고한 의지를 국민들에게 보여줘야 한다. 따라서 펠로시 의장의 대만 방문 등 미국의 대만 개입에 대한 강력한 대응이 불가피한 입장이다. 미국 정치인들에게도 대만은 양보할 수 없는 이슈다. 오는 11월 실시되는 중간선거에서의 승리를 위해선 G2의 한 축인 중국과의 대결에게 밀리는 모습을 보여줘선 안 되기 때문이다.
미·중 갈등이 한국 외교적 입지 좁혀
그럼, 펠로시 의장의 대만 방문과 대만을 둘러싼 미·중 대립 구도가 한반도에는 어떤 영향을 미칠까?
국내외의 한반도 전문가들은 펠로시 의장의 대만 방문은 별다른 영향을 끼치지 않을 것이라고 보고 있지만, 미·중 간의 대립은 장차 한국의 외교적 입지를 좁히는 악재가 될 수 있다고 분석하고 있다.
이런 우려는 당장 한·중 외교부장관 회동에서도 불거졌다. 지난 8월 9일 중국 칭다오에서 만난 박진 외교부 장관과 왕이 중국 외교부장 사이에선 뼈있는 대화가 오갔다. 미국이 주한 미군에 배치한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를 둘러싼 논란이다. 두 장관은 사드가 양국 관계에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하자는 데는 의견을 함께 했지만 그 방법론은 판이하게 달랐다. 왕이 부장은 ‘사드 3불’에 1한까지 덧붙여 박 장관을 압박했다. 사드 3불은 사드를 추가 배치하지 않고, 미국의 미사일방어체계에 참여하지 않고, 한·미·일 군사동맹에도 참여하지 않는다는 것으로 의미한다. 1한은 기존에 배치한 사드의 운용을 제한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사드 운용의 정상화를 원하는 미국의 바람과는 배치되는 것으로 자칫 사드 갈등이 다시 불거질 가능성도 있다. 한국이 미·중이 대립하는 신 냉전 체제에서 희생양이 될 수 있다는 뜻이다.
윤석열 정부, 안미경중 뛰어넘은 묘책 짜내야
이런 상황에서 윤석열 정부가 펠로시 의장의 방한 때 보인 외교술은 적절했다는 평가가 많다. 윤 대통령은 펠로시 의장을 직접 만나는 대신 40분간 전화 통화를 했다. 일부에선 윤 대통령이 직접 펠로시 의장을 만나지 않은 것을 두고 문전박대라고 꼬집기도 했지만 미·중 분위기를 감안할 때 현명한 선택이었다고 볼 수 있다. 중국 매체인 인민일보 계열의 글로벌타임스는 “펠로시 의장을 요란하게 접대할 경우 중국의 적대감을 일으킬 수 있기에 윤 대통령이 의도적으로 만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한편 북한도 이 같은 국제정세의 흐름에 발빠른 행보를 보이고 있다. 이례적으로 펠로시 의장의 대만 방문에 따른 미·중 갈등과 관련해 신속하게 성명을 냈다. 북한 외무성은 “최근 미 의회 하원의장의 대만 행각 문제가 국제사회의 커다란 우려를 자아내고 있다”며 “미국의 파렴치한 내정간섭 행위”라고 중국 편을 들었다.
이처럼 미·중 갈등이 깊어질수록 양국을 중심으로 한 주변국들의 결집도 두드러지고 있다. 중국을 중심으로 등 반미국가들이 모이는 형국으로, 이는 결코 한반도 안정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북·중·러의 결속이 한·미·일과 대립각을 세우면서 동북아에서의 긴장을 고조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흔히 안미경중(安美經中·안보는 미국, 경제는 중국)의 시대는 끝났다고 한다. 그렇다고 미국이 제공하는 안보 지원과 중국이 제공하는 거대 시장을 무시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다. 주한 미군의 필요성은 물론, 우리 수출의 25%를 차지하는 중국 시장이 양날의 칼이 된 셈이다. 미국과의 동맹을 더욱 공고하면서도 중국의 심기를 관리할 수 있는 윤석열 정부의 혜안이 필요한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