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Zoom In] 반도체 동맹 칩4⋯ K반도체 산업 먹거리 미래 좌우
김정호(서강대 경제대학원 겸임교수)
지난 몇 년 사이에 경제가 참 많이 변했다. 제조 한 나라가 어디인지 따지지 않고 싸고 좋은 것을 구입하는 것이 경제의 원리였는데 이제는 어느 나라에서 만드는가가 중요해졌다. 특히 반도체는 그렇다. 내 스마트폰에 들어있는 반도체가 한국산인지 미 국산인지 누구도 따지지 않았고 그럴 필요도 없었다. 스마트폰만 잘 돌아간다면 그 안에 뭐가 들었던 무슨 상관인가. 하지만 이제 세상이 변해서 반도체의 국적이 중요해졌다.
가장 큰 원인은 미국과 중국 사이의 갈등이다. 중국의 국력이 급성장하고, 전체주의 색채를 강하게 드러내기 시작하자 미국이 본격적 견제에 나서게 되었다. 그 중심에 반도체가 있다. 그 손톱만 한 물건이 인공지능 등 차세대 산업과 첨단무기의 핵심을 이루기 때문이다.
코로나로 인한 세계 공급망 교란도 한몫을 했다. 반도체가 없어 자동차 생산이 멈추는 일이 벌어졌다. 급기야 정치인들이 반도체를 구하기 위해 대만 의 TSMC에 가서 머리를 조아리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그러면서 나라들마다 자국 영토 내에서 반도체를 생산해야겠다는 필요를 느끼게 되었다. 급기야 미국, 유럽, 일본이 모두 자국 내에 반도체 공장을 만들기 에 나섰다.
첨단 반도체 산업 놓고 미중 갈등 격화
여기서 반도체 산업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 각각의 요소가 어느 나라에 분포해 있는지를 이해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반도체 산업은 회로를 그리는 설계 과정, 그것을 실리콘 웨이퍼에 새겨 넣는 전공정, 그 웨이퍼를 절단하고 포장하는 후공정, 완성된 칩으로 컴퓨터나 통신기기, 가전제품을 만드는 과정으로 구성된다.
삼성전자처럼 설계부터 반도체 제조까지 모두 포괄하는 기업을 IDM 종합반도체기업이라고 부른다. SK Hynix, 미국의 인텔도 IDM에 속한다. 설계만 하는 기업도 많다. 이들을 팹리스(Fabless)라고 부르는데, 반도체 공장인 팹(fab)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뜻이다.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퀄컴, 게임용 그래픽 칩으로 성공한 엔비디아, 인텔에 도전하고 있는 AMD 등이 여기에 속한다. 공장이 없으니 제조를 누군가에 맡겨야 하는데, 이들에게 설계도대로 반도체를 만들어주는 기업이 파운드리이다. 처음부터 여기에 특화 한 곳이 대만의 TSMC와 UMC, 중국의 SMIC 등이다. 이 분야가 급격히 성장하면서 한국의 삼성전자도 이 분야에 본격 진출해 있고, 미국의 인텔도 파운드리 사업 진출을 선언했다.
소재와 장비는 미국과 일본, 네덜란드가 강자이다. 10나노 이하 제품의 제조에 반드시 필요한 EUV 극자외선 노광장비는 네덜란드의 ASML이 유일한 공급자다. 회로 설계의 필수품인 EDA 설계소프 트웨어는 미국의 시놉시스(Synopsys)와 캐이던스 (Cadence)가 최강자이고, 불필요한 부분을 녹여내는 데 쓰이는 불화수소는 일본 기업들이 가장 정밀한 제품을 만든다. 지적재산권만 공급하는 기업도 있다. 거의 모든 스마트폰의 구동용 반도체는 암(ARM)이라는 기업의 설계도를 기반으로 하는데, 그 소재지는 영국이고 소유자는 일본의 소프트뱅크다. 얼마 전 이재용 부회장을 만나러 왔던 손정의 회장의 투자회사다.
반도체 산업에서 또 다른 요소는 시장이다. 생산 된 반도체로 최종 제품을 만들어 소화해주는 기업이 없다면 생산도 제대로 이뤄질 수 없다. 그 역할은 중국이 가장 왕성하게 해왔다. 5G 통신기기, 컴퓨터, 가전제품의 생산 메카가 이 나라이기 때문이다.
매우 복잡해 보이는 공급망이지만 수십 년 동안 문제없이 잘 작동해 왔다. 믿기 어려울 정도의 트랜지스터 집적도가 그 증거다. 1960년 무렵 발명된 최초의 집적회로들은 10개 미만의 트랜지스터로 만들어졌는데, 최근 애플 아이폰14에 들어간 ‘A16 바이오닉’ 칩에는 무려 160억 개가 들어있다. 회로의 미세함 이 거의 극한에 도달했다고 봐야 한다. 반도체의 글로벌 공급망이 잘 작동하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그 공급망이 파열되기 시작했다. 반도체 패권 다툼 때문이다.
반도체 패권을 위한 공방… 칩4 동맹
반도체 패권을 차지하기 위한 나라들 간의 공방은 크게 두 갈래로 벌어지고 있다. 첫째는 미국의 중국 때리기이다. 중국을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에서 배제하려는 정책들이 전방위적으로 펼쳐지고 있다. 미국은 트럼프 시절에 이미 화웨이의 반도체 조달 루트를 차단해서 성공을 거둔 바가 있다. 2020년 무렵까지 화웨이는 그야말로 욱일승천의 기세였다. 세계 5G 장비의 최강자였고, 스마트폰에서도 하루가 다르게 성장해서 시장점유율 1인자인 삼성에 거의 근접 해 있었다. 화웨이는 회로 설계 전문기업인 하이실리 콘을 자회사로 두고 여기서 설계된 첨단 제품을 대만의 TSMC에 위탁생산해서 쓰고 있었다. 미국이 그 루 트를 차단하자 화웨이는 첨단반도체를 조달할 수 없게 되었다. 결국 5G 스마트폰 사업을 포기하다시피 했다. 아마 5G 통신장비 쪽이 타격도 심할 것으로 보인다.
새로 대통령이 된 바이든은 트럼프보다 훨씬 더 강력하고 포괄적인 제재에 나섰다. TSMC와 엔비디아 등 자국 및 우방국 기업들이 중국 기업들에 첨단 반도체를 공급하지 못하게 막는 것은 물론, 첨단 장비의 공급도 차단했다. 10나노 이하의 미세공정에 꼭 필요한 EUV 즉 극초단파 노광장비의 중국 판매를 금지했고, 첨단 설계소프트웨어도 중국에 들어가지 못하게 막았다. 더욱 치명적인 것은 미국 국적자의 중국 반도체 기업 취업에 대한 금지조치다. 그동안 중국의 반도체 산업이 발전한 배경에는 중국계 미국인들의 활약이 크게 작용했다. 이번 조치로 그 들이 대부분 철수하게 됐으니 그 타격은 심각할 것이다.
한편 칩4 동맹은 미중 반도체 대결의 또 다른 축 을 이룰 전망이다. 반도체 산업에서 중심 역할을 하는 대만-한국-일본을 미국을 중심으로 협력망을 구성하겠다는 것인데 이제 협의를 시작하는 단계여서 구체적 내용이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지는 아직 알 수 없다. 하지만 글로벌 공급망에서 중국을 배제하면서도 그에 따른 공급 차질을 최소화하기 위한 목적임은 분명해 보인다.
글로벌 반도체 공방의 또 다른 갈래는 나라마다 자국 영토 내에 팹, 즉 제조시설을 짓겠다고 나선 일이다. 미국은 자국 내 반도체 공장 유치를 위해 반도체 및 과학법(Chips and Science Act)을 제정했고 520 억 달러를 지원한다고 선언했다. 인텔, AMD 같은 자국 기업들뿐 아니라 한국의 삼성전자 및 SK Hynix, 대만의 TSMC 같은 기업에게도 지원을 해줄 테니 미국에 공장을 짓거나 확장하라고 제안을 겸한 압력을 가하고 있고 실제로 새로운 공장들이 지어지기 시작 했다. 일본은 TSMC에 지원금을 주어가며 쿠마모토에 새로운 합작 공장을 짓는 일에 나섰다. 독일, 프랑스, 스위스 같은 유럽 국가들도 자국 내 제조 공장을 짓겠다고 움직임이 분주하다. 물론 삼성, SK, TSMC의 시설 확장 투자는 자국 내에서 더욱 큰 규모로 진 행되고 있다.
반도체 공급망의 지각변동은 세상을 어떻게 바꾸어 놓을까? 무엇보다 중국이 치명타를 입을 것으로 보인다. 중국의 파운드리, 즉 위탁생산 기업 SMIC는 EUV 장비를 구할 수가 없으니 10나노 이하의 제품을 만들기가 어렵다. 최근에 정밀도가 떨어지는 DUV 장비를 사용해서 7나노급 반도체를 생산했음이 밝혀지긴 했지만, 상업적 경쟁력은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 이다. 게다가 미국 인력들이 중국을 떠나야 하기때문에 기존 장비의 유지관리도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중국의 상당한 경쟁력을 자랑했던 5G 통신과 인공지능 산업은 모두 첨단반도체를 기반으로 했다. 더 이상 그것을 조달하지 못하게 됐으니 그 산업들을 발전시키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중국은 28나노 이상, 소위 성숙공정(Legacy Node)에 머물 가능성이 높아졌다. 가전제품이나 전 기자동차용 정도로는 문제가 없지만 5나노, 3나노 수준에 도전하고 있는 삼성이나 TSMC와는 큰 차이가 있다.
공급망의 패권 다툼 때문에 초래될 또 다른 결과는 글로벌 반도체 시장에서 심각한 공급과잉이다. 중국은 반도체의 가장 큰 수요자인데 중국 밖의 반도체 생산자들은 그곳에 팔기가 어려워졌다. 그만큼 수요 가 줄어든다는 말이다. 안 그래도 미국 연준의 갑작스러운 고금리 정책 때문에 세계가 불황으로 치닫는 판이다. D램 가격이 고꾸라지고 삼성전자의 이익 전망이 급격히 나빠진 것이 다가오는 불황의 징후이다. 거기에 중국 시장까지 닫히게 되니 반도체 수요는 더욱 줄어들 것이다.
글로벌 반도체 전쟁에 따른 한국의 득과 실
반면 공급은 넘쳐나게 생겼다. 삼성전자와 SK Hynix, TSMC가 모두 시설 확대에 엄청난 돈을 쏟아 붓고 있다. 일본, 미국, 유럽 등 제조는 거의 하지 않던 나라들에도 엄청난 제조시설이 들어선다. 머지않아 이들이 엄청난 양의 첨단반도체를 쏟아낼 것이다. 특별히 수요가 폭발하지 않는 한, 가격 폭락을 피해 가기는 어려울 것이다.
한편 우리나라의 반도체 기업들은 득과 실을 모 두 겪어야 하는 입장이다. 가장 큰 이득은 중국의 경쟁을 어느 정도 피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앞서 예로 들었던 화웨이의 경우만 해도 그렇다. 미국의 제재가 없었다면 지금쯤 화웨이 스마트폰의 시장점유율은 세계 1위가 되었을 것임이 분명하다. 삼성은 디스플레이에서 중국에 시장을 내줬듯이 스마트폰에서도 같은 처지로 전락했을 가능성이 높다. 일본이 한국 기업에 당했듯이 한국도 중국 기업에 따라잡히기 직전이었는데 제재 덕분에 기사회생 한 셈이다.
낸드플래시 메모리의 경우도 중국의 YMTC가 한국 기업들을 위협하고 있었다. 128단은 이미 양산에 성공해서 저가 공세를 시작했고 한국과 거의 비슷한 수준이 232단의 개발에도 성공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런 추세대로라면 디스플레이 시장의 재판이 될 수 있었는데 마침 이 분야도 미국의 제재가 시작됐다. 우리 기업들은 아마도 안도의 한숨을 쉬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상황이 좋기만 한 것은 아니다. 삼성과 SK Hynix가 중국에서 운영 중인 공장들은 중국 것으로 취급받을 수밖에 없다. 최근 1년의 유예기간을 허용받긴 했지만 중국 기업 취급을 면하기는 어렵다고 봐야 한다. 결국 밖으로 옮기거나 폐쇄해야 할 텐데 보통 고통스러운 일이 아니다.
중국에 팔기 어려워지는 것은 더욱 큰 고통이다. 2021년 한국의 반도체 수출액 1300억 달러 중에서 중국의 비중은 40%, 500억 달러에 달한다. 이중 어느 정도가 미국의 제재에 해당할지 확실히 알 수는 없지만 상당 부분이 될 것임은 분명하다. 물론 중국이 막히는 만큼 베트남이나 태국, 멕시코 등에 새로 운 가전공장 등이 생겨나서 한국산 반도체를 수입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다. 또 중국이 빠져나가면 글로벌 시장 자체가 작아진다고 봐야 한다. 생산의 축소는 불가피해 보인다. 반도체 공장은 나라마다 생겨나는데 시장은 줄어든다. 한동안 반도체 산업은 글로벌 시장 판도에 따라 격동의 시간을 견뎌내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