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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 내가 체험한 6.25전쟁 (김점곤 평화연구원 원장)
장소 자유센터 평화대연회장
일시 2006년 6월 22일
인사 김점곤 박사(평화연구원 원장)


6.25전쟁은 한반도의 지정학적 조건상 ‘불가피한 전쟁’이었다. 1950년대 미·소 냉전 상황에서 소련에게 한반도 지배는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
북한을 거쳐 남한까지 지배해야 일본을 견제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만약 한국이 공산화됐다면 일본도 공산화됐을 가능성이 높고 동북아 정세는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6.25전쟁은 우리가 일본을 대신해서 치른 대리전이라고 할 수 있다.
중국은 ‘순망치한’(脣亡齒寒)을 참전의 이유로 내세웠다.

“입술(북한)이 없으면 이(중국)가 시리기 때문에 이를 막기위해 참전한 것이다.
북한 김일성은 한반도 적화통일과 통일한반도 지배야욕을 달성하기 위해 전쟁을 도발했다.
이렇듯 3자 모두 속셈이 달랐다.
6.25전쟁은 성격상 지역적 제한전이라는 특성이 있다. 제2차 세계대전 후의 ‘제한전쟁의 모델’이라고 할 수 있다.

먼저 한반도라는 공간을 벗어나지 않았다.
1953년 정전회담 당시 밝혀진 얘기로는 소련은 물론 동유럽 여러 위성국에서 기술자와 전문가들이 차출되어 6.25전쟁에 참전했다고 한다.
그러므로, 6.25전쟁은 공산권 전체가 참전한 전쟁이라고 할 수 있다.
자유진영에서는 한국을 지원하기 위해 유엔 16개국이 참전했다. 이렇듯 6.25전쟁은 사실상 세계가 양분돼 싸운 국제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반도라는 공간은 벗어나지 않았다.
나는 해방과 분단 당시 육군본부 전략정보과장과 첩보과장으로 근무했다.
6.25전쟁 발발 이전 여러 정보를 검토한 끝에 북한군이 사단.군단 단위의 훈련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당시 우리 군은 중대 단위의 전투훈련도 소화하고 있지 못했다.
난 북한군의 남침을 예고하는 군정보판단서를 냈으나 당시 남한정부는 “미군이 있는 한 북한군의 남침은 있을 수 없다”고 방심하고 있었다.
결국 국군은 북한군의 기습남침에 속수무책으로 밀려나고 말았다.
이후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을 위시한 국군의 반격으로 전세를 뒤짚었으나 중공군의 개입 등으로 소모전을 치른후 정전협정이 체결됐다.
1953년 7월27일 성립된 정전협정에선 침략전쟁의 주역인 소련과 중국, 북한에 대해 아무런 제재도 하지 못했다.

오히려 공산주의 진영에선 적반하장으로 미 제국주의 침략과 한국의 북침설을 날조했다.
그리고 바로 그 같은 공산주의자 특유의 억지선전과 선동의 독소가 아직도 한국 땅을 병들게 하고 있다.
나는 전쟁발발시 최전선 지휘관으로서 3년간 전쟁을 직접 지휘했었다.
오늘 포럼을 통해 내가 몸소 체험한 6.25전쟁의 실상이 많은 사람들에게 올바로 전해져 역사에 기록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