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적인 선비사상과 청백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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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 관리자
  • 작성일 : 2021-09-03 15:35:01
  • 분류 : 자유마당

전통적인 선비사상과 청백리

청렴의 개념도 시대에 따라 변화공정과 검소가 핵심

 

오순숙(백제문학회 회장)

 

 

요즘도 청백리(淸白吏)라는 용어를 많이 사용하고 있는데 청백리하고 하면 청렴결백한 관리를 말하거나 청백리로 선정된 본인을 말한다.

다산 정약용 선생의 목민심서(牧民心書) 2권을 보면 중국 송()나라 때의 학자 육구연(陸九淵)이 쓴 상산록(象山錄)에 이르기를 청렴(淸廉)에 세 등급이 있다. 나라에서 주는 봉급 이외에는 아무것도 먹지 않고, 설령 먹고 남은 것이 있더라도 (집으로) 가지고 가지 않으며, (퇴직 이후 집으로) 돌아가는 날에는 시원스럽게 한 필의 말()만 남는 것이 옛날에 이른바 염리(廉吏)라는 것이다. 그다음으로 봉급 외에 명분이 바른 것은 먹되 바르지 않는 것은 절대로 먹지 않는 것이다. 가장 아래로는 무릇 이미 선례가 서 있는 것은 비록 명분이 바르지 않더라도 먹되 아직 선례가 서 있지 않은 것은 자기가 먼저 시작하지 않고, 향임(鄕任) 등의 벼슬도 팔지 않으며, 재앙을 핑계로 곡식을 농간하지 않고, 송사(訟事)나 옥사(獄事)를 돈으로 처리하지도 않으며, 세금을 더 부과하여 남는 것을 착복하는 것도 하지 않는 것이 오늘의 소위 염리라는 것이다.

녹봉(祿俸)만으로 지내는 것이 본시 선한 것이지만 만일 그렇게 할 수 없다면 아마 그다음이라고 하여도 좋을 것이다. 소위 최하의 것은 아마 옛날 같으면 반드시 삶아 죽였을 것이다.

()을 즐기고 악()을 부끄럽게 여기는 사람이라면 결코 그런 짓은 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다소 장황하지만 당시 청렴하다고 하는 사람들의 기준도 시대에 따라 변해왔고 원칙에서 보면 한참 벗어난 짓을 하는 사람이라는 얘기가 된다.

우리나라에서는 중국의 제도를 본떠 고려시대부터 이러한 제도를 운영하여 왔으며, 일반적으로 이미 사망한 사람은 청백리라고 하고 생존해 있는 사람은 염근리’(廉謹吏)라고 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청백리를 선발하는 방법은 일정하지 않았으며, 시기도 정해져 있지 않았지만 청백리를 선발하라는 임금의 지시가 있거나 신하의 건의가 있어 왕이 승낙을 하면 2품 이상이나 감사(監司)가 대상자를 예조(禮曹)에 추천하면 예조에서 정리하여 의정부(議政府)의 논의를 거쳐 임금에게 보고하는 방식이었다. 어떤 때는 사헌부, 사간원 등에서 후보자를 추천하기도 하였다.

보통 청백리는 본인이 죽은 뒤에 선정되는 경우가 많았으나 생전에 선발되는 경우도 있었다. 청백리로 선정되면 본인에게는 벼슬을 추증하거나 올려주고 후손들에게도 특별지시로 벼슬을 주는 등 많은 혜택이 주어졌다.

염근리로 선정된 경우에도 본인의 품계를 올려주거나 요직으로 발탁하고 연회를 베풀며 임금이 말이나 표리(表裏, 옷감)을 하사(下賜)하는 등 관리들이 청렴한 생활을 하도록 유도해 왔다. 반대로 공금 횡령 등의 중죄로 처벌받은 사람은 장리(贓吏)라고 하여 명단을 별도로 관리하고 그 아들은 과거에 응시할 수 없었다.

조선시대의 청백리 명단을 보면 자료마다 조금씩 다르게 나타나 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모두 87명의 청백리 선정결과가 기록되어 있다. 태조, 세종, 세조, 성종, 경종, 순조 시대의 청백리 선정은 조선왕조실록이나 승정원일기에서 확인할 수 없다.

정조 시대에는 대상자로 추천한 사람은 많은 데 비해 정해진 사람은 영조 시대에 이미 정하였으나 발표하지 않았던 사람들을 선정한 결과만 기록되어 있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는 11명의 왕이 157명을 청백리로 선발하였다고 되어 있다. 청선고(淸選考)에는 11명의 왕이 186명을 선발한 것으로 되어 있고 대동장고(大同掌攷)에는 11명의 왕이 116명을 청백리로 선발하였다고 되어 있다. 전고대방(典故大方)에 제일 많은 14명의 왕이 218명을 선발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증보문헌비고1770(영조 46) 처음 만들었고 정조, 순조 때 보완했다. 1907(광무 11) 12월 다시 보완하여 다음 해 7월 인쇄하여 배포한 책이다.

다만 영조 시대 명단은 1796(정조 20) 우의정 윤시동이 “1747(영조 23) 이미 윤허를 받은 사람들이므로 다시 거론할 필요가 없으니 영조대의 청백리로 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여 청렴한 관리 중에 고인이 된 윤지인, 허정, 윤용, 정형복과 한덕필을 선정하였다.

청선고1906(광무 10) 2월경 편찬한 것으로 보인다. 궁궐 내 규장각에 보관되어 있던 책으로 재질이나 형태 등으로 보안 개인이 만들 수 없을 정도의 책자로 신빙성이 있다. 조선시대에 관리를 지냈거나 종친, 부마 등의 인적사항을 기록한 것으로 약 4만 명에 대한 본관, 할아버지·아버지의 인적사항, 과거 합격연도 등 각종 자료가 많이 수록되어 있다. 그러므로 두 책자에 실려 있는 사람은 확실하게 청백리라고 볼 수 있다.

대동장고는 순조 때의 학자인 홍경모(17741851)가 편찬한 책으로 다른 3개 자료와 다른 부문이 없으므로 크게 참고가 되지 않는다. 전고대방은 일제강점기에 학자 겸 출판사를 직접 운영하며 한국역사를 널리 알리기 위해 애쓰던 강효석이 1924년 발행한 책으로 일종의 인명록이다. 개인이 편찬한 자료이므로 신빙성은 떨어지지만 편찬자가 무엇인가 근거를 가지고 만들었을 것이므로 현재의 시점에서 아니라고 단정하기도 어렵다.

목민심서2권을 보면 조선시대에 청백리로 뽑힌 자는 겨우 110명인데 태조 이후로 45, 중종 이후로 37, 인조 이후로 28명이며 경종 이후로는 어떻게 뽑는 것조차 끊어졌다.”고 개탄하고 있다. 그러나 중종, 명종, 선조대의 청백리, 염근리 선정은 확실한 자료가 있다. 인조, 숙종, 영조대의 청백리, 염근리 자료도 명확하다.

순조실록51224일 기록에 숙종 20년 이후 청백리 녹선이 없었습니다.”라고 하는 것을 보면 정확하게 판단하기 어렵다. 정조실록을 보면 영조대의 청백리로 선정한 내용이 있으므로 순조실록도 정확한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조선왕조실록승정원일기를 보면 위의 자료와 맞는 경우도 있지만 확인이 되지 않는 경우도 있다. 숙종실록에는 청백리로 선정된 명단이 나와 있지만 영조실록에는 논의하는 과정만 있다. 정조실록에는 추천된 사람들의 명단은 있으나 그중 선정된 사람은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중종실록81119일 기록을 보면 청백리 부산포 첨사 박유인(朴有仁)의 아들을 서용하라는 지시가 있고 이틀 뒤의 기록에는 청백리 여윤철(呂允哲)의 아들을 서용한 것이 잘못되었다는 내용이 있다. 인조실록21413일 기록을 보면 선왕조(선조) 청백리 홍성민, 박순은 시호를 청하지 말라고 했다는 기록이 있다.

영조실록7117일 기록을 보면 부호군 이의만(李宜晩)이 염백(廉白)에 뽑혀 규정을 건너 승진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호피(虎皮)를 하사했다.”는 내용이 있다. 승정원일기영조 19101일을 보면 이최원이 과거에 합격했는데 청백리 이의만의 아들이라는 내용이 있다.

그런가 하면 순흥지를 보면 청백리인 감사 윤지완(尹趾完)이 살펴보았다고 되어 있고 경재집을 보면 하연(河演)이 세조 9년에 청백리에 녹선되었다는 내용이 있다. 이렇게 보면 자료상 청백리라고 기재되어 있는 사람 외에 일반적으로 청백리라 부르던 사람들도 많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청백리로 선발된 사람 외에도 청렴하게 살다간 사람도 많았고 청백리로 선발된 사람 중에도 부정을 저지른 사람도 있다.

선조 때 임진왜란으로 피란살이를 했던 오희문(吳希文·15391613)이 쓴 쇄미록을 보면 그 전쟁 중에도 종들을 여러 명 데리고 다녔는데 조선시대에 정승이나 판서 정도의 벼슬을 하는 사람이면 밥하는 사람, 빨래하는 사람, 가마 메고 다니는 사람 등 하인이 적어도 10명은 넘었을 것이다.

청백리의 대표적인 사례인 황희(黃喜·13631452) 정승도 집안에 데리고 있던 노비가 30명 정도였고 외거노비가 70명 정도였다고 하니 이것이 보편적인 생활이었을 것이다.

정승이 두어 칸 정도의 집에 살았다면 그 집의 노비는 어디서 생활했을까? 또 당시는 거의 첩()을 데리고 살았으므로 그 첩들은 어디서 살았을까? 또 관리가 먹을 것이 없어 굶을 지경이라면 그 집의 노비들은 무엇을 먹고 살았을까? 주인은 굶거나 말거나 노비들은 잘 먹고 지냈을까?

인조 때 이괄의 난을 진압하는 데 큰 공을 세운 정충신(鄭忠信·15761636) 장군의 일화를 보면, 경상도병사(2) 시절 양식이 없다고 아들이 와서 얘기하니 나보고 어쩌란 말이야하며 역정을 냈다고 한다.

당시 고관을 지내려면 사간원이나 사헌부 등에서 인사검증을 하기 때문에 품행을 단정히 해야 고위관료로 성장할 수 있었다. 관행적으로 주고받는 범위를 벗어난 물품 수수 등은 탄핵의 대상이 되었다.

임진왜란 전까지는 녹봉과 관리들에게 나누어 준 토지(科田)에서 나오는 수확으로 기본적인 품위유지가 가능했기 때문에 부정부패는 별로 없었다. 최고의 상납은 노비를 바치는 것이었지만 당시 노비 1명은 소 12마리 정도의 가격에 지나지 않았다.

선조 때 사헌부 헌납 등을 지낸 유희춘(柳希春·15131577)미암일기를 보면 각 처에서 보내온 물품이 기록되어 있다. 2, 3, 간장 1, 1마리, 3개 등 값비싼 물건이 아니었다. 이런 정도는 뇌물로 생각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황희도 노비를 받은 것이 문제가 되었지만 대표적인 청백리로 꼽히고 있다. 임진왜란을 거친 후에 관리들은 녹봉으로는 생활할 수가 없게 되었다. 양반으로서 체면을 유지하기 위해 지출해야 할 경비가 증가했고 관리들에게 준 토지가 환수되었기 때문이다.

화폐가 유통되면서 뇌물을 주고받기가 편리해졌고 부정이 횡행하게 되었다. 인사청탁 등 매관매직도 성행했다.

어떤 분은 청백리로 선정된 분들 중에도 부정을 저지른 사람이 많다고 폄훼하기도 한다. 당시 사회적 풍조에서 상대적으로 청렴한 관리를 청백리로 선정한 것으로 보인다.

그동안 필자가 연구해온 당시 청백리의 기준은 부정을 저지를 수 있는 자리에 있으면서 비교적 공정한 업무처리를 해온 관리 재산을 의도적으로 늘리려고 애쓰지 않은 관리 녹봉 외에 관습에 크게 벗어나지 않는 범위 내에서 남이 주는 것은 받거나 글을 가르치는 등 훈장 노릇을 해서 겨우 생계를 유지한 관리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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