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의 독립운동가 - 유관순 선생

  • No : 2349
  • 작성자 : 관리자
  • 작성일 : 2019-01-08 10:27:40

유관순 선생 (1902. 12. 16. ~ 1920. 9. 28.)



일제의 재판을 거부하는 당당함과 민족적 기개를 잃지 않고, 옥중 만세운동을 전개


유관순 선생은 1902년 12월 16일 충남 목천(현재 천안)에서 아버지 유중권과 어머니 이소제 사이의 5남매 중 둘째 딸로 태어났다. 1918년 4월 이화학당의 고등과 1학년에 진학하였고 3·1운동이 발발하기 바로 전날 고등과 1학년 학생들과 시위 결사대를 조직, 만세시위에 참가하기로 굳게 맹세했다.


드디어 3월 1일 탑골공원을 나온 만세 시위대가 학교 앞을 지나자 선생은 5명의 시위 결사대 동지들과 함께, “내가 있는 동안 너희들을 내보내 고생시킬 수 없다. 나를 밟고 넘어갈 테면 가라”고 하는 교장의 만류를 뿌리치고 뒷담을 넘어 시위운동에 동참했다.


3월 5일 선생은 5명의 시위 결사대와 함께 서울에서 전개된 최대의 시위운동인 남대문역 만세 시위운동에도 참여했다. 학교가 문을 닫게 되자 선생은 서울의 독립운동 소식을 고향에 전했고, 또 거기에서 만세 시위운동을 전개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리하여 선생은 3월 13일 사촌 언니인 유예도와 함께 독립선언서를 몰래 숨겨 가지고 귀향해 본격적으로 고향에서의 만세 시위운동을 주도 적으로 추진했다.


우선 선생은 동네 어른들을 찾아다니며 서울의 3·1 운동 소식을 전했고, “삼천리 강산이 들끓고 있는데 우리 동네만 잠잠할 수 있느냐”고 하면서 만세 시위운동의 필요성을 설득했다. 그리하여 4월 1일(음력 3월 1일) 아우내 장날 정오에 만세 시위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정하고, 유림 대표들과 집성촌 대표들을 움직여 시위 참가 인원을 확보하도록 했고, 거사 당일에 사람들에게 나누어줄 태극기를 직접 만드는 등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다.


드디어 4월 1일 병천면 아우내 장날, 선생은 장터 어귀에서 밤새 만든 태극기를 나누어 주면서 만세 시위운동에 참여하러 모여드는 사람들에게 용기를 북돋아 줬다. 오후 1시 3천여 장꾼이 장거리를 뒤덮었다. 선생과 만세 시위운동을 주도적으로 추진하였던 조인원이 긴대나무 장대에 매단 큰 태극기를 장터 한가운데 세우면서 아우내 장터의 만세시위운동이 시작됐다. 시위 대열이 아우내 장터 곳곳을 누비자 병천 헌병주재소의 헌병들이 달려와 총검을 휘두르며 만세 시위운동을 탄압하기 시작했다.


이 때 선생의 아버지 유중권이 “왜 사람을 함부로 죽이느냐”고 항의하다가 일본 헌병의 총검에 찔려 순국하였고, 이를 보고 남편의 원수를 갚으려고 달려들다가 선생의 모친마저도 일본 헌병들에게 학살당했다.


이에 선생은 군중들을 이끌고, 아버지의 시신을 둘러메고 병천 헌병주재소로 쇄도하여 항의 시위를 계속했다. 선생은 고야마 주재소장의 멱살을 쥐고 흔들면서 “나라를 되찾으려고 정당한 일을 했는데 어째서 총기를 사용하여 내 민족을 죽이느냐”고 일제의 만행을 규탄하면서 독립운동의 정당성을 밝혔다. 헌병들은 재차 무차별 총격을 가하여 시위 군중들을 해산시킨 뒤, 그 날 저녁 선생과 유중무, 조인원, 조병호 부자 등 시위 주동자들을 체포하여 천안헌병대로 압송했다.


선생은 천안헌병대에서 갖은 고문을 받으면서도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이 시위 주동자라고 말하면서 죄 없는 다른 사람들을 석방하라고 호통치기도 했다.


이후 공주감옥으로 이송될 때에는 군중들이 많이 모여 있는 곳을 지날 때마다 독립만세를 연이어 고창해 불굴의 독립의지를 표출하기도 했다. 공주지방법원에서 진행된 재판과정 중 선생은 법정에서, “나는 한국 사람이다. 너희들은 우리 땅에 와서 우리 동포들을 수없이 죽이고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죽였으니 죄를 지은 자는 바로 너희들이다. 우리들은 너희들에게 형벌을 줄 권리는 있어도 너희들은 우리를 재판할 그 어떤 권리도 명분도 없다”고 하면서 일제의 재판을 거부하는 당당함과 민족적 기개를 잃지 않았다.


선생은 6월 3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선고받았지만 상고하지 않아 형이 확정됐다. 이후에도 선생은 서대문 감옥에서의 온갖 탄압과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옥중 만세를 불렀다. 특히 1920년 3월 1일 3·1운동 1주년을 맞이해서는 수감 중인 동지들과 함께 대대적인 옥중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이로 인해 선생은 지하 감방에 감금되어 야만적이고 무자비한 고문을 당하게 됐다. 선생은 고문으로 인해 방광이 터지는 중상을 입었으나 치료하지 못한 채 고문의 후유증과 영양실조로 1920년 9월 28일 오전 8시경, 서대문감옥에서 18살의 꽃다운 나이로 순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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