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사태’로 본 중국의 일국양제 명과 암

  • No : 2662
  • 작성자 : 관리자
  • 작성일 : 2019-10-07 15:44:40

최근 홍콩의 시위 사태가 연일
뉴스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
다. 넉 달째 이어지고 있는 홍콩의
시위는 홍콩 역사상 최장기 시위 기
록을 갈아 치우고 있다. 2014년 9월
24일부터 12월 15일까지 79일간 전
개된 ‘우산혁명(최루탄 등을 우산으
로 막아서 생긴 별칭)’보다 무려 한
달이나 더 지속된 셈이고 아직도 사
태 해결의 기미는 보이지 않는 상황
이다.
홍콩의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
(SCMP)는 홍콩 시민이 길거리로 나
와 반정부 시위를 벌인 것은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절박한 심정 때문이라
보도하면서 이번 시위는 이전의 시위
와는 전혀 다른 양상이라 분석했다.
홍콩 시위의 발단과 진행과정
시위의 발단은 중국과 밀접한 관
계가 있다. 지난 2월 12일 홍콩 정부
가 ‘범죄인 인도 법안(일명 송환법)’
을 추진하기로 결정하면서 시작됐
는데, 법안은 범죄인 인도조약을 체
결하지 않은 국가나 지역에도 범죄
인을 인도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문제는 이 법안이 중국을
범죄인 인도대상 지역에 포함시켰
기 때문이다.
법안을 추진하게 된 계기는 2018
년 2월 대만에서 일어난 홍콩인 살
인사건으로부터 시작됐다. 당시 20
대 홍콩인 남녀가 대만으로 여행
을 떠났다가 남자 친구가 여자 친구
를 살해하고 그 시신을 대만에 유기
한 뒤 홍콩으로 귀국했다. 하지만 홍
콩경찰은 살해자를 체포하고도 대
만과 범죄인 인도조약을 맺고 있지
않았기에 대만에 신병을 인도할 수
없었다. 또한 홍콩 내에서 범죄가
발생한 것도 아니라서 살인범을 처
벌할 수 있는 법적 근거도 찾을 수
없었다.
이에 홍콩 정부는 범죄인 인도조
약을 체결하지 않은 국가에도 범죄
인을 보낼 수 있도록 하는 ‘송환법’
을 상정하기로 결정한다. 이 법안에
는 대만뿐만 아니라 중국과 마카오
등도 포함되어 있다. 홍콩 시민들은
이 법안이 중국의 부당한 정치적 판
단으로 홍콩의 반중 인사나 인권운
동가를 중국 본토로 송환할 수 있어,
다분히 악용될 소지가 있다고 우려
해 거센 반발을 하는 것이다.
2019년 3월 31일 시작된 시위는 6
월 12일 송환법 2차 심의를 앞두고
시위 규모가 커졌다. 6월 9일 홍콩
시민 100만 명이 참여하면서 송환법
반대 시위가 본격화됐고, 일주일이
지난 16일에는 200만 명이 운집하면
서 홍콩 역사상 최대 규모의 시위로
기록되기도 했다. 740여만 명의 홍콩
인구를 감안할 때, 송환법을 반대하
는 사회적 공감대가 어느 정도로 형
성되었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7월 1
일 시위대가 우리의 국회에 해당하
는 입법회를 습격했고 중국의 국가
휘장을 검은 페인트로 훼손하고 영국
식민지 시절 사용하던 영국령 홍콩기
를 걸어놓는 사건까지 일어났다.
이런 상황에서 캐리 람 홍콩 행정
장관은 송환법이 사실상 죽었다면
회기 내 법안 통과가 불가능하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시위의 양상은 한
층 격화되기 시작했다. 시위대의 요
구 사항이 송환법의 완전한 철폐란
점을 알면서도 홍콩 정부가 언어의
유희를 통해 홍콩인들을 농락하고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시위대는 행정장관의 사퇴와 ‘송환
법’의 완전한 철폐, 시위대를 ‘폭도’
로 규정한 것을 철회하고 체포된 시
위자에 대한 조건 없는 석방 및 불기
소, 무력 진압을 강행한 경찰 지도부
에 대한 독립적인 조사 및 처벌, 보
통선거(행정장관 직선제) 실시 등의
‘5대 요구 사항’을 들고 나오게 됐다.
하지만 홍콩정부는 홍콩인들의 총파
업 돌입에도 불구하고 강경 진압을
고수했고, 이 과정에서 사상자들이
속출하기에 이른다.
분노한 시위대는 홍콩 이슈의 국
제화를 위해 국제사회에 호소하는
한편, 공항을 점거함으로써 홍콩 공
항의 ‘셧다운’이란 전대미문의 사태
를 낳기도 했다. 이로써 평화로운 시
위의 상징으로 인식된 홍콩의 시위
가 폭력과 유혈사태로 얼룩지게 됐
다. 급기야 8월 25일에는 홍콩 경찰
이 최초로 실탄을 발사했고, 우산혁
명의 주역들을 비롯한 야권 인사들
이 체포되면서 사태는 더욱 심각해
졌다.
한편 중국 정부는 무장경찰의 홍
콩 투입 가능성을 시사하는 소요진
압 훈련을 홍콩의 지척인 선전(深圳)
에서 진행하며 홍콩 시위대를 압박
했고 홍콩 시민들은 소위 ‘3파(罷) 운
동(철시, 파업, 수업거부)’을 전개하
기에 이른다. 9월 4일 캐리 람 홍콩
행정장관이 결국 송환법의 완전한
철폐를 발표했지만, 홍콩사태의 양
상은 아직도 뚜렷한 해결의 실마리
찾지 못한 상황이다.
홍콩인의 정체성과 반중 정서
과거의 홍콩인들은 중국인으로 살
아왔다. 그러나 아편전쟁 이후 홍콩
이 영국에 할양됨으로써 150년 동안
영국의 식민통치를 받은 뒤 1997년
반환으로 다시 중국인이 됐다. 홍콩
인들은 지난 150년 동안 영국인으
로 살다가 반환 이후 22년 동안 중
국인으로 살고 있는 셈이다. 즉, 홍
콩인이 느끼는 정체성의 혼란 역시
이번 시위와 상당한 상당관계를 갖
고 있다.
최근 송환법 반대시위로 반중 정
서가 강해지면서 홍콩인들은 “우리
는 중국인이 아니라 영국인”이라고
주장하며 영국에 영주권 발급을 요
구하고 있다. 홍콩인들이 중국인임
을 거부하고 영국인이 되고자 하는
것은 ‘자유민주주의’와 ‘법의 지배’를
향유했고 또 이를 지지하기 때문이
라 할 수 있다. 이미 9만 명의 홍콩
시민이 영국의회의 웹사이트에 영
주권 허용에 대한 청원을 한 것도 이
와 무관하지 않다.
1997년 홍콩이 중국에 반환될 때,
영국은 ‘해외거주 영국인’을 뜻하
는 BNO여권을 홍콩인들에게 발급
했다. 이 여권을 소지하면 준영국인
으로 간주돼 영국에 거주할 수는 있
지만 취업은 불가하다. 한마디로 반
쪽짜리 영국 시민권인 셈이다. 10년
마다 갱신해야 효력이 있는 이 여권
을 발급받는 홍콩인은 2018년까지
340만 명에 이르지만, 중국의 국제
적 위상이 증대되면서 인기가 시들
해져 현재 유효한 BNO여권 소지자
는 17만 명 정도에 불과하다. 해외에
서 중국 공관의 도움을 받을 수 있으
니 중국 정부가 발행한 홍콩특별행
정구(SAR) 여권이 더 가치가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2000년대 후반까지
BNO여권은 한 해 평균 1만여 건의
발급만을 기록했지만, 2012년 시진
핑이 집권한 이후 홍콩에 대한 간섭
이 노골화되면서 갱신 건수가 급증
하기 시작했다. 홍콩의 시위대가 17
만 명의 BNO여권 소지자 외에도 영
국 거주를 희망하는 모든 홍콩인들
에게 영주권을 부여해야 한다고 주
장하는 이유다.
뿐만 아니라, 시위대는 미국 영사
관으로 몰려가 성조기를 흔들고 미
국 국가를 제창하며 트럼프대통령
의 적극적인 홍콩 개입을 요구하고
있기도 하다. 미 행정부가 홍콩 시민
들을 대신해 중국을 압박하고 미 의
회가 ‘홍콩 인권과 민주주의 법안’을
조속히 통과시켜줄 것을 촉구했다
는 점도 홍콩인의 한계와 정체성 문
제와 맥을 같이 한다.
최근 중국인들은 홍콩인들에 대한
적대감을 노골적으로 표출하고 있
다. 인민해방군을 투입해서라도 홍
콩사태를 조속히 진압해야 한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홍콩인들을 ‘탈중
국화’를 시도하는 폭도나 반역자들
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중국과 중
국인들은 홍콩 반환을 150년간 오욕
의 역사를 청산하고 조국의 품에서
‘중국의 꿈’을 실현할 수 있는 기회라
여긴다. 즉, 중국은 홍콩에 새로운
미래를 약속한 시혜자이고, 홍콩은
중국의 은혜를 입은 수혜자라 인식
하는 것이다. 따라서 포용적이고 평
등한 관계에 기초한 중국-홍콩관계
가 아닌 수직적인 관계를 당연시하
고 있다는 점도 홍콩인들의 정체성
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요인이다. 다
만 홍콩의 반중 정서는 단순히 중국
과 중국인을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중국 공산당의 일방적인 홍콩 압박
을 반대한다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할
필요가 있다. 언론에서 흔히 표현하
는 반중 정서라면 홍콩의 시위는 반
환 순간부터 지속되었어야 하고, 시
위대의 요구도 중국과 중국인을 대
상으로 진행되어야 마땅하다. 따라
서 홍콩의 시위는 분명 중국 공산당
을 향한 저항이자 부정이다.
홍콩시위의 근본 원인
‘불평등’과 ‘일국일제’
홍콩인들의 탈중국화와 시위 사이
에는 어떠한 인과관계가 존재하는
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중국의 조바
심이 원인이고, 홍콩에 대한 노골적
인 간섭과 지배력 강화에 대한 저항
과정이며 ‘일국일제(一國一制)’가 아
닌 ‘일국양제’의 실현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다.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홍콩 반환
의 시기가 다가오자 영국은 중국과
의 협상에 나섰다. 영국은 신계(新
界)지구의 임차기간을 15년 더 연장
해 2012년까지 소유하려 했으나, 중
국은 이 제안을 단호히 거절했다. 아
편전쟁의 결과물인 홍콩 할양이 불
평등조약이니 뭐니 해도 영구히 할
양한 것이기에 홍콩섬과 구룡지역을
제외한 신계만이라도 반환받아야 한
다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홍콩 영토
의 60% 이상인 신계지구에 이미 상
당한 인프라가 남아있었기에 신계를
돌려줄 경우 홍콩섬과 구룡지역의
관리와 운영이 거의 불가능할 것으
로 인식한 영국은 몇 개의 조건을 더
받아내는 대신 홍콩 전체를 중국에
반환하기로 결정했다.
1984년 중국과 영국은 ‘공동협정’
을 체결했고 1997년 7월 1일을 기점
으로 홍콩을 중국에 반환하되 최소
50년간 ‘일국양제’를 통해 현상유지
하며 홍콩인의 홍콩에 대한 통치와
고도의 자치를 향유한다는 약속을
덩샤오핑으로부터 받아냈고 ‘중영공
동협정’에도 이 점을 명시했다.
그러나 문제는 홍콩 반환 이후, ‘50
년 불변’이란 해석에 있어 홍콩인들
과 중국 간에 상당한 괴리가 발생했
다. 중국은 50년 동안 홍콩을 ‘중국
화’하는 것으로 이해한 반면 홍콩인
들은 ‘공동협정’에 따라 홍콩의 각
종 시스템과 제도가 50년간 유지되
는 것으로 이해한 것이다. 2000년대
들어서면서 중국은 우선 홍콩의 언
론을 중국화했고 홍콩 정부조직과
운영관리에 적극적으로 개입했으
며, 사회 및 교육제도에 있어 중국화
와 애국주의를 주입시키기 시작했
다. 1997년 홍콩이 중국에 반환될 당
시 중국이 약속했던 ‘일국양제’의 원
칙은 지켜지지 않았고 급격한 ‘일국
일제’가 진행된 것이다. 특히 시진핑
집권 이후 홍콩에 대한 통제는 더욱
강화되고 있다.
‘홍콩 행정장관은 베이징의 나팔수’
홍콩 특별자치구를 대표하는 홍콩
행정장관은 12000여 명으로 구성된 선
거인단의 간접선거를 통해 선출된 뒤
베이징 중앙정부에 의해 임명된다.
그렇다보니 행정장관은 베이징의
나팔수로 전락했고 홍콩인을 대변하
지도 보호도 못하는 꼭두각시가 된
것이다. 정치 분야에서 홍콩의 민주
주의가 서서히 쇄락해 가고 있는 것
이다.
정치적 요인 외에도 경제적 소외
도 홍콩에 큰 충격을 주었다. 일각
에서는 정치적 요인보다 경제적 요
인이 더 크다는 지적도 있다. 반환
이후 경제적 불평등이 더욱 확대됐
기 때문이다. 경제사회적 불평등을
나타내는 지니계수를 보면 홍콩 반
환 이후 누적된 경제적 불평등이 얼
마나 심각한 수준인지 알 수 있다.
2018년 홍콩의 지니계수는 0.539로
나타났는데, 0.5를 넘었다는 것은 위
험신호다. 홍콩의 시위는 경제적 불
평등에 대한 경제 투쟁이라 봐도 무
방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달팽이
집’이라 불리는 ‘워쥐(蜗居)’는 자동
차 한 대를 주차할 정도의 공간이다.
이런 환경에서 살고 있는 홍콩인은
21만 명에 이른다. 더욱이 홍콩의 아
파트 값은 세계에서 가장 비싸다. 아
파트 평균 임대료가 미국 뉴욕보다
27%나 비싸고, 최저임금은 한화로
5682원에 불과하다. 740여 만 홍콩인
중 20%가 빈곤에 허덕이고 있다는
점은 이번 시위과정에서 전 세계에
알려진 불편한 진실이다.
홍콩의 젊은이들이 거리로 나온
것은 이 같은 상황에 절망하고 번영
의 과실을 오히려 중국인들에 의해
구축되고 있는 누적된 불만이 여과
없이 분출된 결과다. 인류 역사상 유
례를 찾아볼 수 없는 ‘리더가 없는’
시위는 지도자가 없다는 면에서는
유연성과 탁월한 복원성을 갖지만
방향이 정해지면 되돌리기 쉽지 않
다는 약점이 있다.
‘일국양제’는 분명 모험적인 시험
이다. 하지만 이 실험이 홍콩에서
성공하지 못한다면 중국이 꿈꾸는
통일된 조국의 ‘위대한 중화 부흥’
은 한낮 백일몽에 불과할 수도 있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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