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학 생활 중에도 한 시도 조국 독립의 염원을 버리지 않고 근화회를 조직해 지속적 항일투쟁 전개
선생은 1892년 6월 18일 황해도에서 태어났다. 1918 년 1월 8일 미국 대통령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원칙이 발표되고, 이듬해 1월부터 파리강화회의가 개최된다는 소식이 알려지게 됐다.
재일 동경 유학생들은 한국 독립의 절호의 기회로 이 용하고자 독립선언을 준비했다. 이것이 동경 유학생들 의 2·8독립선언 계획이다, 선생과 황애덕을 비롯한 여 자 유학생들도 참여해 활동했다.
선생은 2·8독립선언문 10여 장을 미농지에 복사해 옷 속에 감추고는 현해탄을 건너 2월 17일 동경을 출발 해 부산에 도착했다. 교육계·기독교계·천도교계의 지 도자들을 만나 국내에서의 거족적인 독립운동을 촉구 했다. 3·1운동 날에도 선생은 여성들에게 독립운동 참 여를 촉구했고 선생은 배후 지도자로 지목되어 학생들 과 함께 체포됐다.
출감 후 선생은 정신여학교 동창과 교사들이 중심 이 된 대한민국애국부인회의 조직과 활동 상황을 알게 됐다. 선생과 임원들은 애국부인회의 조직 확대와 여성 독립운동의 활성화 방안을 논의한 뒤, 선행 조치로 선 생을 회장, 황애덕을 총무부장으로 선임했다. 이후 중 국 남경대학에 입학해 일본에서 못 다한 공부를 계속 하는 한편, 상해의 대한애국부인회에 참여하여 활동했 다. 또한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에서 황해도 대의원으로 선출되어 활약했다.
상해에서의 독립운동의 난맥상과 분열에 실망한 선 생은 못다한 공부를 마치기로 결심하고, 1923년 6월 21 일 미국 유학을 위해 상해를 떠났다. 그리고 1928년 2 월 12일 황애덕·박인덕 등 미국에 유학 중인 여학생들 을 중심으로 여성 독립운동 단체인 근화회를 조직했다.
1932년 7월 귀국했고, 종교 모임과 강론을 통해 민족 의식을 고취하는 등 지속적인 항일투쟁을 전개했다. 선 생은 고문 후유증이 재발함에 따라 병원에 입원해 치료 를 받던 중, 1944년 3월 13일 순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