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중분석]일본의 화이트리스트 배제 조치와 산업현장 (조동근 명지대학교 경제학과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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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 관리자
  • 작성일 : 2019-09-02 13:47:05
  • 분류 : 자유마당

조동근 명지대학교 경제학과 명예교수


일본은 한국 대법원의 일제 강점기 강제징용 배상에
대한 원고승소 판결을 이유로 지난 8월 2일 한국을
백색국가(수출절차 우대국) 명단에서 제외했다. 한국도
10일 후 똑같이 일본을 백색국가 명단에서 제외했다. 한
일 모두 ‘수출절차 간소화 우대국’의 지위를 상실한 만큼
부품과 소재를 수출할 때 포괄적 승인이 불가능해져 품
목별로 최장 90일이 소요되는 개별심사를 받아야만 한다.
필요한 때 필요한 양의 부품과 소재를 수입해 쓰다 제
동이 걸렸으니 한국 기업으로선 여간 곤혹스런 일이 아
닐 수 없다.
통상 무역전쟁은 완제품에 대한 관세부과를 의미한다.
자국 산업보호가 명분이다. 따라서 관세를 통한 무역전
쟁은 어디까지나 ‘방어개념’이다. 그러나 일본이 취한 부
품과 소재의 수출제한 조치는 자국산업 보호와는 거리가
멀다. 일본의 부품 및 소재 산업에 이익이 되려면 수출이
신장되어야 하나 일본의 정책 행태는 이와 반대다. 관세
부과가 수동적 방어개념이라면 비관세 수출 규제는 상대
교역국의 산업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려는 목적에서 시도
되는 ‘적극적 공격’ 개념이다. 시쳇말로 상대방을 괴롭히
겠다는 것이다.
당하는 우리 입장에서는 WTO(세계무역기구) 제소를
고려해 볼 수 있지만 유감스럽게도 실효적 조치가 되기
어렵다. 일본이 한국을 ‘우대 지위에서 배제하는 형식’을
취한 것이기에 한국을 차별한 것으로 보기 어렵기 때문
이다. 우리로선 형식상 ‘합법적’이지만 불공정한 결정으
로 불이익을 받는 경우에 걸 수 있는 ‘비위반 제소(Non�Violation Complaint)’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결과가 나오
기까지 2~3년 걸리고 또 이긴다는 보장도 없다.
한·일 외교 갈등 본질을 직시해야
 
최근 한·일 갈등의 본질은 ‘1965년 한일청구권 협정으
로 모든 손해배상이 종료되었다고 볼 수 있는지’ 여부에
대한 해석차이다. 일본은 당연히 종료됐다는 입장이고
한국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작년 10월 대법원 전원합
의체는 강제징용 피해자 4명이 신일본제철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의 재상고심 선고 공판에서 피해자
들에게 일정금액을 지급하라는 ‘원고 승소 판결’을 내렸
다. 손해배상 청구권이 ‘여전히 살아있음’을 인정한 것이다.
한·일 간 긴장이 촉발될 수밖에 없는 구조이다. 문재인 대
통령은 ‘강제징용 노동자 배상은 사법부 판결’이므로 삼권
분립의 원칙에 의거 한국정부는 이를 존중해야 한다는 주
장이다. 하지만 ‘사법부 판단이기에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
다’는 대응은 국제 외교에서 설득력을 갖기 어렵다. 국가와
그 국가에 속한 대법원이 별개일 수 없기 때문이다.
강제노동에 대한 청구권 소송은 비단 한국에만 국한
된 것은 아니다. 1941년 태평양전쟁 포로였던 제임스 킹
(James King)은 낮에는 일본 철강회사에서 일하고 밤에는
포로수용소에 수감돼 고통받다가 종전과 함께 석방됐다.
그를 포함한 피해자들이 캘리포니아 법원에 일본 회사를
상대로 손해배상소송을 제기했지만, 당시 미국 연방법원
은 이를 기각했다.
미 연방법원은 “일본과의 평화협정(샌프란시스코 조약)
이 원고들의 주장을 막고 있지만, 원고가 받아야 할 충분
한 보상은 앞으로 올 평화와 교환되었다”고 판결했다. 연
방법원은 ‘원고들의 희생에 무한한 감사를 표하면서도’
청구를 기각함으로써 평화조약을 수호했다. 미 연방법원
의 판결은 그 자체가 ‘문명사적 기록’으로 남았다.
한국 정부는 일본 정부로부터 한일청구권 자금으로 당
시로서는 매우 큰 돈인 ‘무상 3억 달러, 장기 저리 자금 2
억 달러’를 받았다. 이 돈은 오늘날 경제건설의 종잣돈
(Seed Money)으로 쓰였다. 그렇다면 강제징용당한 사람들
의 수고와 피해는 ‘앞으로 올 조국의 눈부신 경제번영’과
맞교환되었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그들에게 보상이 필
요하다면 경제성장의 결과로 축적된 부에서 지불하는 것
도 한 방법이다. 또 그 길이 국격을 높이는 것일 수 있다.
부품 국산화 100% 가능한가
일본은 수출규제로 한국의 아픈 데를 찔렀다. 통상 한
쪽의 급소는 상대방의 급소이기도 하지만 이번 경우는
일본이 우리가 더 아픈 데를 찔렀다. 우리나라는 일본이
수출 규제한 3개 품목을 연간 5천억 원에 수입해 무려 170
조 원의 반도체와 디스플레이를 제조해 왔다. ‘1대 340’의
구조다. 1을 지렛대로 340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카드이다.
이들 제품을 빠른시간 내에 국산화하거나 또는 대체재를
구하는 것은 쉽지 않다. ‘소금을 구하지 못해 무한정 팔
수 있는 빵을 만들지 못하는 것’에 비유될 수 있다.
일본의 소재산업이 강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쇼
와덴코 1903년’, ‘스미토모화학 1913년’, ‘스텔라케미파
1916년’, 지난달 일본 정부의 전격적인 대한(對韓) 수출규
제 조치로 주목받은 3개 반도체·디스플레이 소재를 생
산하는 일본 업체들의 창립연도다. 적지 않은 일본 소재
업체들의 역사는 100년 안팎에 이른다. 이들 기업은 오랜
기간 한 우물을 판 ‘깊이’에 다양한 제품군이라는 ‘넓이’까
지 갖고 있다.
일본이 소재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이유로 소재산
업 자체의 특징과 일본 특유의 ‘모노즈쿠리’(좋은 물건 만
들기) 전통이 맞물렸기 때문이다. 정보통신기술(IT) 등 완
제품 산업은 독창적 기술과 아이디어로 순식간에 업계
구도를 바꾸고 주도권을 움켜쥘 수 있다. 당시만 해도 난
공불락으로 여겨졌던 노키아를 몰락시킨 스티브 잡스의
‘아이폰’ 출시가 이를 웅변하고 있다. 하지만 소재산업은
이 같은 불연속적 기술발전을 기대하기 힘들다. 여전히
상당한 시간 축적이 필요한 ‘아날로그’ 성격이 강하다.
소재는 그 특성상 역설계(Reverse Engineering)나 복제
가 쉽지 않다. 완제품은 분해를 할 수 있지만 소재는 분
해할 수 없다. 일본 소재업체들은 주요 생산제품의 배합
및 처리공정에 대한 보안을 강화하면서 ‘기술적’ 진입장
벽을 유지했다. ‘축적의 시간’ 그 자체가 높은 진입장벽
인 것이다.
일본의 수출규제가 작동되자 문재인 대통령은 국민들
에게 “일본에 다시는 지지 않겠다. 힘을 모아 달라”고 했
다. 성윤모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은 일본의 화이트리스
트 배제 결정 직후 한국이 영향을 받게 되는 핵심 품목은
159개로 당장 큰 영향을 받을 것 같지 않다고 했다. 김현
종 국가안보실 2차장은 일본이 수출을 규제한 1194개 전
략물자를 검토해보니 우리에게 진짜 영향을 미치는 전략
물자는 ‘손 한 줌 정도’라고 했다. 정치권이 취할 수 있는
입장은 그럴 수밖에 없다. 하지만 민간 부분의 입장은 다
르다.
기업의 51.6% 경영에 악영향 미칠 것
한국경제연구원은 19일 비금융업 기준 매출 1000대 기
업을 대상으로 일본의 수출규제가 미치는 영향에 대해
설문조사(응답기업 153개)를 시행했다. 응답기업의 51.6%
가 일본의 수출규제가 경영에 ‘악영향을 미칠 것’이라
고 답했고, ‘영향이 없다’고 한 기업은 48.4%였다. 기업
들은 일본의 경제보복으로 매출이 평균 2.8% 감소할 것
으로 전망했다. 업종별 매출 감소율 전망치는 일반기계
가 13.6%로 가장 높았다. 이어 석유제품(-7.0%) 반도체
(-6.6%) 철강제품(-3.9%) 무선통신기기(-2.7%) 순이었다.
영업이익은 평균 1.9% 줄어들 것으로 예상했다.
지난해 매출 1000대 기업의 평균 영업이익률(5.3%)을
감안하면 영업이익이 1.9% 감소할 경우 상당수의 기업들
은 적자전환할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Intel Inside’에 비
견되는 ‘Japan Inside’를 잊어서는 안 된다. 일본의 핵심 부
품·소재 없이는 스마트폰 자동차 정밀화학 등 국내 산업
이 안 돌아간다.
일본과의 무역분쟁은 역설적으로 소득주도성장으로 대
변되는 분배정책에 함몰되었던 정책시야를 중립지대로
이동시키는 데 기여했다. 기술 자립과 혁신성장의 중요
성을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정부가 내년 예
산안에서 가장 공을 들인 부문도 소재·부품·장비로 대변
되는 ‘소부장 산업’이다. ‘소부장’ 관련 분야에만 쓸 수 있
도록 ‘특별회계’를 한시적으로 신설해 올해(8000억 원)보
다 2.5배 많은 2조 원 이상을 투입하기로 했다. 이 자금은
연구개발(R&D)과 각종 실증·테스트 장비를 구입하고 실
험하는 데 쓰인다.
정부가 ‘소부장’을 국가 핵심산업으로 키우기로 한 것은
긍정적으로 평가할 만하다. 하지만 예산배정 만으로 ‘소
부장’을 키울 수는 없다. 예산배정과 동시에 ‘산업안전보
건법’, ‘화학물질관리법’ 등 각종 규제를 현실에 맞게 풀어
줘야 한다.
그러면 산업정책의 궁극적인 목표를 소재·부품 100%
국산화로 삼을 것인가. 결론부터 말하면 100% 국산화는
불가능하다. 완벽한 국산화는 고집에 불과하다. 예를 들
어 ‘고순도 불화수소’를 국산화했다고 치자. 하지만 이는
제조기술의 국산화일 뿐이다. 중국에서 저순도 불화수
소·황산 등 재료를 수입해야 한다. 한국은 무역으로 먹
고사는 나라로 소재 수입이 불가피하다. 한국입장에서는
‘글로벌 분업체계’를 유지해야 한다. 한국이 소재· 부품·
조립 모든 것을 다 잘할 수 없다. 따라서 국제분업 관계를
복원시키는 노력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외교분쟁 풀어야 경제갈등 풀린다
한국의 반도체와 일본의 소재산업은 글로벌 분업과 협
업의 대표적인 성공 사례이다. 일본산 소재와 부품에 대
한 의존은 오랜 한·일 간 국제 분업의 결과이다. 국제 분
업을 통해 그동안 한국과 일본 모두 ‘교환의 이익’을 누려
왔다. 이 분업 구조가 무역분쟁으로 깨진 것이다. 한일 간
의 무역전쟁은 소모적이고 또 양방향으로 손해를 초래할
뿐만 아니라, 자유무역 원칙에 반한다. 무역분쟁의 방아
쇠를 직접 당긴 일본의 책임은 결코 가벼울 수 없다.
외교분쟁은 상대가 있기 마련이다. 국내여론을 통해 이
를 해결할 수는 없다. 명분과 논리의 축적이 중요하다. 일
본을 규탄하는 촛불집회를 열고, 일본제품을 불매하고,
국민연금의 전범기업에 대한 투자를 제한하는 입법을 통
해 일본을 이길 수는 없다.
‘반일 부추기기’를 통해 정치적 이득을 추구하려 했다면
이는 미래를 착취한 것이다. 일반 대중의 정치적 지지를
이용해 외교 현안을 해결하려 했다면, 이는 ‘외교 무지’를
드러낸 것이다.
우리는 “현재가 과거와 싸우면 미래를 잃는다”고 한 윈
스턴 처칠의 말을 곱씹어야 한다. 반일은 쉽지만 극일은
어렵다. ‘진정한 극일’은 일본 보다 더 잘사는 것이고 또
일본 보다 더 많은 국제사회의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것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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