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징 올림픽 이후 중국의 길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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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 관리자
  • 작성일 : 2022-03-03 13:23:42
  • 분류 : 자유마당

베이징 올림픽 이후 중국의 길은···

근대화 열망 속에 가려진 독주의 길

 

전명윤(여행·문화 전문가)

 

 베이징의 상전벽해와 인식 변화

2008년 베이징 올림픽을 앞두고 석 달가량 베이징에 머물렀다. 베이징 올림픽을 앞두고 관련 책을 내겠다는 생각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역사적 현장에 고개라도 빼꼼 내밀고 직접 봐야 한다는 강박감이 습관처럼 도졌기 때문이다.

2005년에 천 페이지가 넘는 중국 관련 책을 낸 이후 매년 방문했기에 베이징이 변해가는 과정은 머릿속에 남아 있었다. 천안문 광장의 동쪽, 국가 박물관에는 거대한 카운트 다운 전광판이 생겨났다. 1,000일부터 카운트 다운을 시작했으니 근 2년 반짜리 전광판인 셈이다. 갈 때마다 그 숫자는 줄어들었고, 그만큼 천안문 광장의 경계도 삼엄해져 갔다. 그 사이 별일이 있었다고는 볼 수 없지만, 올림픽 직전이 되자 천안문 광장 주변의 전철역은 모두 무정차 통과했고, 지하도를 거쳐 천안문 광장으로 가기 위해서는 짐을 엑스레이 투시기 넣고 몸수색을 당해야 했다.

한국도 1988년에 그랬기 때문에 이런 예민함이 크게 불쾌하진 않았다.

베이징은 거대한 공사장이었다. 거대한 봉황알을 연상시키는 베이징 국립 오페라 하우스가 완공되었고, 오페라 하우스의 정북 쪽에는 새장처럼 생겼다해 냐오차오(鳥巢)라 불리는 올림픽 주경기장은 마무리 공사를 하고 있었다. 베이징 동쪽, 차오양취(朝阳区) 일대에는 CCTV 신사옥을 비롯해 XX SOHO라 불리는 화려한 오피스 건물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완공됐다. LG의 쌍둥이 타워가 일대에서 가장 번듯한 건물이었던 게 불과 몇 년 전이었던 상황이라 그야말로 상전벽해도 이런 상전벽해가 없었다.

20081월 베이징 전역이 공사장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어디를 가나 타워 크레인으로 스카이라인을 만들던 시절, 원명원이 복원돼 재개장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화원과 함께 대청제국 시절 베이징 근교에 있던 황제의 2대 별궁 중 하나였던 원명원은 한때 만원지원(萬園之園), 정원 중의 정원이라 불리던 곳이다. 특히 건륭제의 명에 의해 이탈리아의 신부이자 미술가였던 주세페 카스티글리오네와 예수회 선교사였던 장 유렌(友仁, 미셸 베누아)장의 감독하에 지어진 서양루는 중국 최초의 서양식 정원이기도 했다.

베이징을 34일 정도 일정으로 방문한 여행자였다면 이화원은 알아도 원명원은 처음 듣는다고 할지 모른다. 원명원은 2차 아편전쟁 당시 베이징 외곽을 점령한 영국, 프랑스 군대에 의해 한차례 도난 및 불타버렸고, 1900년 의화단의 난을 진압하겠다고 베이징에 진주한 8개국 연합군에 의해 아예 파괴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중국 사람들은 1900년 이후 원명원의 수난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지만, 1912년 청나라가 망한 후 베이징을 교대로 점령한 온갖 군벌들에게도 약탈당하기 일쑤였다. 이 덕에 원명원에서 약탈당한 보물들은 전 세계에 흩어져 있고, 이런 유물들이 경매시장에라도 흘러들어오면 중국 재벌 한둘이 나서서 반드시 구입해 국가에 기증하는 일종의 중국 부자 애국심 테스트의 한 방법이 되기도 했다.

아무튼 이런 사연의 원명원은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후에도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아 반쯤은 폐허로 방치된 터였다. 사정이 이러니 일반적인 여행자라면 일부만 개방된 원명원보다는 웅장한 호수를 감상할 수 있고, 중국 근대사 최고의 악당 격인 서태후의 수많은 이야기가 서린 이화원을 더 선호하게 될 수밖에 없는 건 당연한 일이다.

 

, 경제성장으로 민주화 견인할까?

1842년 아편전쟁의 패배는 아시아 전역을 격변으로 몰아갔다. 황제국으로 동아시아의 질서를 좌우했던 대청제국의 황혼은 고요하기는커녕 산산이 조각난 채 맞이할 수밖에 없었고, 중국의 영향력 하에 있던 베트남과 조선의 운명도 다르지 않았다. 예외가 있다면 성공적으로 서구화의 길을 걸을 수 있었던 일본뿐이었다.

중화인민공화국이 건국된 게 언젠데 2000년대까지 수도 안에 있던 제국주의의 상처들을 손도 못 대고 있었다는 사실은 꽤 의외긴 했다. 물론 1948년 이후 중국의 역사를 살펴보면 역사복원 같은 거창한 이야기는 말도 꺼내지 못할 만큼 혼란스러웠던 것도 사실이지만.

원명원에서 나는 중국인들이 느끼는 감회가 꽤 궁금했기에 풍경을 감상하는 척하며 몇 명의 중국인에게 말을 걸었다. 사람들은 하나같이 그나마 복원돼서 다행이며, 중국은 과거의 비극에 연연해하지 않는다. 중국은 서구로부터 배울 게 많다.’는 지극히 온건한 대답이 돌아왔다.

김영삼 정부 시절 중앙청이 폭파되었을 때 한국인들이 뿜어내던 차오르는 국뽕과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약간의 적대심 같은 것도 보이지 않았다. 중국인 특유의 자부심도 없었고, 불과 얼마 전까지 사방에서 외치던 반제국주의 같은 정치적 슬로건과도 꽤 톤이 달랐다. 사실 중국이란 나라는 개인의 정치적 의사라는 게 없다시피 하는 경우가 많다. 개인은 본인의 정치적 견해를 밖으로 내지 않는다. 그랬던 수많은 사람이 어찌 되었는지를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개개인에게 한 질문이지만 그건 요즘 중국 공산당의 입장이기도 했다. 이 나라는 언제나 당의 입장과 개인의 입장을 항상 일치했기 때문에.

당시 당의 입장은 이 시점으로부터 2년 전, 중국 전역에서 방영된 다큐멘터리 대국굴기(大国崛起)에서 주장한 방향성과 일치했다. 덩샤오핑식으로 말한다면 결코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조용히 때를 기다린다는 도광양회(韬光养晦) 그 자체였다.

이 시기에 만나는 모든 중국인은 이구동성으로 우리는 선진국으로부터 많은 것을 배워야 하며 배울 준비가 되었다.’고 말했다. 1989년에 벌어진 천안문 학살로부터 19. 적어도 2008년의 베이징은 그때의 과오를 다시는 되풀이 하지 않을 것 같았다.

2008년의 베이징은 세계로 나가려고 했고, 국제사회도 중국의 복귀를 환영했다. 덩샤오핑 이후에 등장한 두 명의 지도자들 또한 적어도 홍콩에서 벌어진 시민들의 항의에 대해 유화적인 입장을 취했다. 종종 무리수는 있었지만 시민들이 항의하면 이를 곧바로 수용했다. 다들, 그렇게 중국의 경제성장이 이어지면 언젠가 점진적인 민주화도 따라올 것이라도 낙관했다. 여행자로서 나도 더 많은 외국인 방문 제한구역이 풀리리라 여겼다.

 

거침없이 질주하는 중국, 요원한 선진국의 길

2022, 코로나 팬데믹 상황에서 열린 두 번째 베이징 올림픽은 많은 면에서 2008년과 확연히 다르다. 그 사이 중국은 엄청난 경제성장을 했다. 2008US $4.6조로 미국 국내총생산의 30%에 불과하던 중국의 국내총생산은 2022US $18조로 네 배나 늘었고, 미국 총생산에 80%에 육박하고 있다. 큰 이변이 없는 한 조만간 중국은 적어도 국내총생산에서만큼은 미국을 앞지를 예정이다. 비록 인민 1인당 수입에서는 미국은 물론 한국에도 못 미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체 규모에 있어 세계 1위로 등극한다는 상징성이 남다르다는 걸 부정할 순 없다. 중국의 거침없는 질주는 바로 여기서 시작된다.

한국에서는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고 할지 모르나, 요즘 만나는 중국인 친구들은 차이니스 스탠다드에 대한 이야기를 공공연히 한다. 2차 대전 이후 미국이 구축한 세계 질서를 중국이 바꾸겠다는 의미인데, 단순한 덩치와 규모의 이야기가 아니라 사회 제도적으로도 중국의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가 서구 사회가 그동안 일궈놓은 선거에 기반한 자유민주주의보다 우월하며, 대체 가능하다고 믿는다.

2012년 홍콩에서는 한창 국민교육 문제로 시끄러웠던 적이 있다. 영국령 시대를 겪고, 정치적 권한은 적을지언정 개인의 자유 면에서는 서구의 어떤 나라에도 뒤지지 않던 삶을 살았던 홍콩의 기성세대를 중국화 시키는 걸 포기하고, 자라나는 아이들만이라도 친중적 사고를 견지하기 위해 국민교육이라는 체제선전 교육을 교과목에 집어넣으려고 했다 시민들의 저항에 실패하고만 사건이다.

한참 홍콩 시민들의 반대가 거세지던 시점, CNN에 의해 국민교육을 위한 교사용 지침서가 폭로된 적이 있었다.

공산당 일당만 인정하는 중국의 단일 정당 제도가 인류의 가장 진보적 정치 제도이다. 이 제도에서 정치인은 아무런 사심 없이, 오직 인민의 단합을 위하는 통치를 행한다.

미국과 같은 복수정당제 국가에서는 정치인이 집권을 위해 정쟁을 일삼는다. 그들은 이기적으로 행동하며 사회 혼란을 야기할 뿐이다.’

이 이야길 진지하게 홍콩 교과서에 담으려 했단 말인데, 실제로 중국에서 사용하는 교과서에는 이런 내용이 자주 등장한다.

중국의 TV에도 여행 프로가 있다. 한국과 마찬가지로 유럽 등 선진국들을 주로 방문하는데, 중국의 여행 프로에는 우리에게는 없는 서사가 있다. 그건 바로 최근에 건설돼 온통 현대풍으로 꾸며진 중국 지하철과 비교되는 런던, 파리, 뉴욕의 지저분한 지하철 풍경이다. 거리의 노숙자도 빠지지 않고 화면에 등장한다. 이들이 요즘 이야기하고 싶은 건 서구의 체제는 이렇게 모든 면에서 낡고 오래됐다. 단지 인프라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정치 제도적으로도 이제 서구식 민주주의는 한계다. 미국과 유럽의 시대는 끝났다. 중국이 세상을 주도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실제로 상하이에서 국제학교를 다닌 적이 있는 한 한국인 지인의 딸은 일본의 오사카를 여행하며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상하이에 비해 오사카는 모든 게 낡았어. 중국이 더 좋은 것 같아.’

아직 가치관이 자리 잡지 못한 아이들에게도 세상은 이렇게 보인다.

2022년에는 2008년과 달리 베이징을 방문하지 못했다. 세계에서 거의 유일하다시피 한 강력한 제로 코로나 정책으로 인해 여행비자는 받을 수 없는 상황. 설사 받는다 해도 최대 8주에 달하는 격리(중국은 성마다 격리 정책이 다르고, 랴오닝성의 경우는 호텔 격리 4, 자가격리 4주를 마쳐야 거리로 나갈 수 있다.)를 버텨낼 자신도 없었다.

대신 중국의 지인들을 통해 요즘 이야기를 듣는다.

시진핑이 화려한 현대 건축물의 디자인에 일침을 가한 이유로 요즘 중국엔 네모반듯한 콘크리트 건물이 다시 유행 한다거나, 자기 자식들 조차 점점 중국 이외의 모든 나라를 적대시한다며 한숨을 쉬기도 한다.

바로 옆에 붙어있는 나라다 보니 중국이 어디로 갈 것이냐에 대한 이야기는 언제나 우리의 삶과 직결된다. 올림픽 내내 언론을 통해 이번 올림픽 와중의 수많은 어둡고, 음울한 이야기들을 듣고 있다.

그러면서 종종 생각한다. 2008, 내가 본 베이징은, 우리의 견실한 이웃일 수 있었던 그 나라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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