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라디보스톡에서 독립운동의 흔적을 쫓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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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 관리자
  • 작성일 : 2019-01-08 10:21:47
  • 분류 : 자유마당

블라디보스톡에서 독립운동의 흔적을 쫓다

강석승(21세기안보전략연구원장)


다사다난했던 2018년 한 해가 서서히 저물어가는 지난해 12월 중순 필자는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에서 한국보훈학회가 주최하는 ‘러시아 연해주 애국운동 발자취와 통일·보훈외교’ 제하의 국제학술대회에 다녀왔다. 우리 측에서 36명, 러시아에서 7명, 중국에서 3명의 교수들이 참가한 이번 학술대회는 내년 상해임시정부 및 3·1독립운동 100주년에 즈음하여 열리는 대회였던 만큼 서울시와 국가보훈처, 외교부 등에서 적지 않은 지원을 받아 이루어졌다.


때문에 그 규모가 다른 어떤 학술대회보다 컸으며 내외의 주목을 받을 만큼 그 내용도 알찼다. 이번 학술대회에서는 《1910년대 연해주 한인들의 독립운동, 소비에트 관점에서 보는 한국의 독립운동, 연해주 지역의 애국지사 연구》 등의 발제와 함께 매우 활발한 토론이 오전부터 오후까지 이뤄졌다. 그리고 블라디보스톡 및 우수리스크 지역의 독립운동 사적지를 참관하는 행사도 병행됐기 때문에 실로 “세월의 흐름은 유수와 같다”는 말을 피부로 느낄만한 여정이었다.


러시아 연해주 지역의 독립운동 유적지 등 참관
우리의 선조들이 배고픔과 추위를 참다못해 월경했던이 지역, 그리고 순국선열들이 일제의 식민통치에 항거하기 위해 목숨을 바쳤던 이곳, 차창으로 펼쳐지는 황량한 벌판을 지나 우리 일행이 목격한 블라디보스톡과 우수리스크 지역에는 그분들의 숭고한 뜻과 바램을 알려주는 빛바랜 유적지들이 산재해 있었다. 그 대표적인 곳으로는 1937년 9월 무려 17만여 명에 달하는 우리 동포들(고려인)이 스탈린 치하에서 영문도 모른 채 화물열차에 강제로 실려 무려 600㎞나 떨어진 척박한 중앙아시아지역으로 이주됐던 ‘라즈돌리노예역’, 솔빈강변에 위치하고 있는 헤이그회의에 참석했다가 일제에 의해 유명을 달리 한 독립운동가 이상설 선생님의 유허비, 일제 치하에서 목숨을 걸고 독립운동자금을 조달해 주셨다가 역시 체포, 처형된 최재형 선생님의 생가, 1860년대부터 연해주 지역으로 이주한 고려인들의 삶과 기억을 소개하는 공간인 고려인문화센터와 안중근의사기념비, 신한촌, 저 멀리 우리 민족의 혼을 일깨워주는 발해유적지 등을 꼽을 수 있겠다.


세월의 흐름과 더불어 이분들은 역사의 뒷무대로 사라져 갔지만, 이분들의 ‘조국과 민족을 위한 숭고한 뜻과 업적’은 우리나라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잇는 가교이자 사회통합과 국가발전의 촉매로서 세대와 계층을 잇는 역할을 하고 있으니, 이 얼마나 값진 것인가! 비록 육신은 사라졌지만 그 숭고한 정신과 뜻은 우리 일행 모두의 가슴에 새겨져 앞으로도 영원히 기억될 것이라 생각된다.


인천공항을 떠나기 전까지만 해도 블라디보스톡은 위도 상 우리나라보다 위쪽에 있는 지역이었기 때문에 상당히 추울 것으로 예측되어 털모자, 조끼, 목도리, 두꺼운 외투 등으로 중무장했으나, 공항에 도착하면서부터 애써 무겁게(?) 준비해간 월동장비는 거의 쓸모가 없게 됐다.


이 지역에 체류하는 동안 단 한 번도 눈이 내리지 않았을 뿐 아니라 날씨까지 쾌청해 우리 일행은 부동항이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는 블라디보스톡의 전경을 두루 즐길 수 있었다. 블라디보스톡에 도착한 첫날 우리 일행은 볼쇼이발레단과 함께 전세계적으로 큰 명성을 얻고 있는 발레단의 공연을 한화 10만원에 가까운 거금을 주고 마린스키극장에서 관람했다. 이튿날은 하루 종일 ‘아지무트호텔’에서 학술대회를 개최했다. 도착 3일차이자 이번 여정 마지막 날에는 블라디보스톡 붉은 광장과 주연방청사, 시베리아횡단열차 기념비 등을 참관하고 발해유적의 도시인 우스리스크로 이동했다. 이 지역에서는 앞서 언급했던 라즈돌리노예역, 이상설유허비, 최재형생가 등을 관람하고 러시아인들의 별장인 ‘다차’가 즐비하게 들어서 있는 사우나로 이동해 야외온천을 즐기는 가운데 통나무집에서 파티를 여는 여유(?)도 가졌다.


70여 년간 체제를 달리한 분단 현실 놓고 상념 잠겨

이런 여정과정에서 필자는 일행과 잠시 떨어져 동행한 우리 연구원의 최영철 이사, 황긍섭 낙동강학생수련원 원장, 경남 고성의 이상근 박사님과 함께 별도의 시간을 내어 북한에서 직영하는 ‘고려관’이라는 식당을 찾았다. 다른 음식점에 비해 비싼 음식가격 때문인지 큰 홀은 2∼3개팀을 제외하고는 텅비어 있었고, 김일성배지(초상 휘장)를 단 한 사람만이 전화로 무언가 통화를 하고 있었다. 필자가 보기에 지배인인 것 같아 공연을 부탁했으나, 자신은 3년째 이곳에 머무르고 있는 문화성 관료라고 신분을 밝혔다. 막간을 이용한 대화과정에서 ‘박희철’이라고 이름을 박힌 53세의 이 관료는 남북한간의 ‘판문점 선언과 평양선언’을 떠올리면서 주한미군의 철수를 강변했다. 이에 필자가 주한미군의 주둔근거와 미국의 막강한 군사력을 설명해 주자, 처음에는 부정적 의사를 피력했으나 주위에 아무도 듣는 이가 없는 것을 확인하고 수긍하는 듯한 입장을 나타냈다.


특히 우리민족끼리 힘을 합쳐 평화통일을 하는 것이 구호와는 달리 매우 어려운 문제라는 점에 공감하면서 “또 만날 것”을 약속하면서 헤어졌다. 돌이켜 보면 우리나라 내부만 해도 지역주의, 계층간 갈등, 빈부격차, 학연과 혈연 등 때문에 통합이 어려운데 정치이념과 체제를 달리 한 채 70여 년을 넘기고 있는 남북한간의 통일은 그야말로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가는 것”과 같이 어려운 것이 아니겠는가?


이런저런 상념을 갖고 호텔에 도착한 우리 일행은 블라디보스톡에서의 마지막 밤을 장식(?)하기 위해 12층에 있는 라운지로 올라가 마침 동행한 고려대의 남광규 교수와 함께 휘황찬란한 시내의 전경을 바라보면서 보드카를 들이켰다.


“자연은 의구한데 인걸은 간데 없다”는 말처럼 이제 곧 새해가 시작된다. 자연의 법칙에 따라 모든 것은 변하기 마련이고, 그 와중에 유한적 존재인 우리 인간은 언젠가는 명멸함이 분명할 진데, 남은 인생을 어떻게 가치있고 보람있게 보낼 것인가를 반문하면서 이번 여정의 과정을 곰곰 되씹어 보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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