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월 1일 김정은의 신년사로 시동을 건 ‘한반도
평화 만들기 프로젝트’는 4월 27일 판문점선언, 9월
19일 평양공동선언 및 군사분야 합의서라는 3대 문건을
만들어내면서 정점을 찍었다. 이후 김정은의 서울답방
무산, 개성연락사무소 철수, 군사분야 합의서의 이행 부
실 등으로 내리막길을 걷다가 5월 초 100% 한국공격용인
단거리미사일 발사로 나락으로 떨어진 느낌이다.
정부는 인도적 차원의 식량지원을 고리로 평화만들기
프로젝트에 다시 활력을 불어넣고자 하지만 남북관계를
작년 9월의 정점으로 다시 끌어올리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지난 1년 6개월간 남북관계는 북한이 주도하고 북한의
의지가 많이 반영된 관계였다고 할 수 있다. 판문점선언
은 ‘10·4 선언’이 체결된 2007년을 지향하며 남북관계를
‘6·15 및 10·4 선언 시대’로 복원하겠다는 김정은의 의도
가 관철된 회담으로 평가된다. 제2차 남북정상회담도 절
차의 투명성과 대통령 경호 등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정
부가 김정은의 갑작스러운 요구를 수용해서 열릴 수 있
었다. 판문점선언처럼 핵문제를 맨 마지막에 명기하고
남북경협에 집중하려던 평양공동선언도 국제사회의 대
북제재라는 벽에 부딪히는 좌절을 겪었다.
판문점선언 평가
군사분야 합의서는 투명성 제고와 상호성 유지 등 군비
통제의 기본원칙을 지키지 않음으로써 북한에 일방적으
로 유리한 합의라는 비판을 받았다.
판문점 정상회담의 키워드는 김정은이 모두발언에서
수차례 언급한 ‘잃어버린 11년’과 선언에 명시된 ‘완전한
비핵화를 통한 핵 없는 한반도’이다. ‘잃어버린 11년’은
10·4 선언이 체결된 2007년을 지향하는 표현으로서 정상
회담과 판문점선언을 계기로 남북관계를 ‘6·15 및 10·4
선언 시대’로 되돌리겠다는 김정은의 의도가 담긴 것이
다. 판문점선언은 ‘10·4 선언 2.0’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10·4 선언의 내용을 대부분 담고 있다. 마치 10·4 선언을
기초로 판문점선언을 작성한 인상을 줄 정도로 이 선언
의 내용 대부분이 판문점선언에 반영되었다.
이후 북한은 ‘남북관계의 전면적이고 획기적인 발전’,
‘공동번영과 자주통일’, ‘겨레의 소망’ 등을 구호로 내세우
고 ‘우리민족끼리 전술’을 구사하며 대북제재 무력화와
국제공조 와해를 시도하고 있다.
정부가 정상회담 준비과정에서 북핵 폐기의 중요성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밝혀왔던 것에 비춰볼 때, 판문점선
언에서 핵 문제가 우선순위와 명확성 측면에서 용두사미
격으로 다뤄지고 김정은의 핵 포기 의사를 명확하게 담
지 못한 것은 매우 실망스러운 결과였다.
핵 문제의 심각성 때문에 성사된 정상회담과 그 결과인
판문점선언은 북핵폐기가 보장되지 않으면 그 의미를 가
질 수 없다. 북한에 핵이 존재하는 상태에서 판문점선언
의 이행이 반발과 부작용을 초래할 것은 불을 보듯 뻔하
다. 선언의 제4항(완전한 비핵화를 통한 핵 없는 한반도)
에 앞서 나열한 군사적 신뢰구축과 단계적 군축, 종전선
언, 평화협정 체결 등도 북한의 완전한 핵 포기가 보장되
지 않는 한 실천하기 어렵고 안보에 도움도 되지 않는다.
판문점선언이 남북한의 합의사항을 열거한 후 마지막
에 한반도 비핵화를 추상적으로 언급함으로써 북한의 핵
문제는 미북 간 논의사안이라는 오랜 입장을 관철한 것
으로 평가된다. “북측이 취하고 있는 주동적인 조치들이
한반도 비핵화를 위해 대단히 의미 있고 중대한 조치”라
는 언급도 논란의 소지가 있다. 중대한 조치가 4월 20일
노동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결정한 핵과 미사일 시
험 중지 및 핵 시험장 폐기를 의미한다면 이는 현실인식
의 중대한 오류다.
이날 채택된 전원회의 결정서는 “핵무기 병기화를 믿음
직하게 실현하였다는 것을 엄숙히 천명”한 다음에 핵실
험과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발사를 중지하고 핵 시험
장을 폐기하겠다고 했다. 당시 김정은도 핵무력 완성으
로 핵실험이나 중장거리 미사일 발사가 필요 없고 핵 시
험장도 사명을 끝마쳤다고 했다. 핵 개발을 완성했기 때
문에 핵·미사일 실험이 필요 없고, 풍계리 핵 시험장도
용도폐기되었다는 뜻이다.
남북관계 전망
최근 통일연구원이 실시한 ‘2019년 통일의식’ 조사에 따
르면, 2018년과 비교할 때 정부가 대북정책을 잘하고 있
다는 평가가 69.5%에서 42.3.%로 줄은 반면, 잘못하고 있
다는 평가는 30.6%에서 57.7%로 늘어났다. 통일정책에 여
론이 제대로 반영되지 않는다는 의견도 67.4%에 달했다.
북한이 핵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는 응답도 72.4%로서
조만간 포기(4.3%), 장기적으로 포기할(23.3%) 것이라는
의견에 비해 세 배가 높았다. 향후 남북관계는 대북지원
을 통해 북한의 핵 포기를 유인하겠다는 정부의 선순환
정책이 아니라 미북 핵 협상의 향배, 더 구체적으로, 북한
이 트럼프의 빅딜을 수용할 것인가에 달려있다.
김정은 정권이 핵을 포기할 가능성이 없고, 트럼프가
김정은에게 양보할 가능성 또한 없기 때문에 남북관계의
전망은 그렇게 밝지 않다. 일각에서는 북한이 올 한 해 도
발수위를 높이다가 한국의 총선을 겨냥해서 내년 초부터
다시 유화적으로 나올 것으로 전망한다. 그러나 남북관
계는 더 큰 구도인 미북관계에 종속되어 있는 형국이기
때문에 미북관계의 실마리가 풀리지 않는 한 제재해제나
교류협력 모두 어려운 실정이다.
최근 북한의 미사일 도발은 한반도 평화만들기 프로젝
트를 되살리려는 불씨에 찬물을 끼얹은 것과 같다. 신형
탄도미사일은 핵탄두를 탑재할 수 있고 정확도도 매우
높아서, 북한이 핵이라는 독을 묻힌 단검을 우리 목에 들
이댄 것과 같이 안보에 심각한 위협이다. 우리 국민들은
이번 미사일 도발을 통해 북한이 전혀 변하지 않았음을
확인했다. 따라서 군이 유엔안보리결의 위반인 ‘미사일
발사’라는 표현을 삼가는 일이 반복되는 경우 국민의 안
전을 소홀히 한다는 비판이 거세어 질 것이다. 정부가 북
핵 폐기에 진전이 없는 상태에서 남북관계를 밀어붙이는
경우 한미관계에도 불똥이 튈 수 있다.
4·27 판문점선언 이후 북한 비핵화를 촉진한다는 명분
으로 한국의 중앙정부는 물론 지방정부까지 나서서 각종
대북협력 제안을 봇물 터지듯 쏟아내는 현상은 미국의 우
려를 자아낼 만했다. 2월 스티브 비건 국무부 대북정책특
별대표가 문희상 국회의장과 여야 대표단을 만난 자리에
서 미국은 남북관계 발전에 반대하지 않지만, 국제사회의
대북제재 틀 안에서 이뤄져야 한다고 한 것은 남북관계의
과속스캔들 가능성에 대한 우려의 메시지였다.
대북정책 방향
국제사회의 대북제재는 북핵 폐기가 실현되는 날까지
남북관계의 어깨 위에 드리워진 멍에이자 한국 혼자서 해
결할 수 없는 불가항력이다. 우리가 북한처럼 국제사회의
이단아로 취급받지 않으려면 핵 문제에 진전이 없는 상황
에서 남북대화에 집중하는 것은 피해야 한다. 특히 종전
선언이나 평화협정 체결 등 한반도 안보구조를 급격히 바
꾸는 인위적인 평화만들기는 바람직하지 않다.
한반도의 안보불안은 정전협정과 같은 제도가 불완전
해서가 아니라 북한정권의 도발 때문이다. 정부는 지금의
한반도 안보상황이 2007년과 비교할 때 매우 달라 졌음을
을 인식하고, 2007년의 시점에 고착되어 있는 대북전략의
기조와 정책을 바꿔야 한다.
무엇보다 우리 국민의 안전과 번영이 곧 평화라는 믿음
을 갖고 국민을 최우선으로 하는 국민중심의 대북정책을
추진해야 한다. 북한과의 교류와 경협도 일차적으로 보호
받고 혜택을 입을 대상은 우리 국민이라는 확고한 인식이
필요하다.
국민에게 부담과 고통을 주는 대북사업은 하지 않는 것
만 못하다. 문재인 대통령의 금년 신년사도 고용안정, 아
이들, 재해예방, 인재육성, 소상공인 등 보통사람들의 편
안한 삶이 주제였다. 사람이 주인공이라는 진실이 한반도
남쪽에만 머물 수는 없다. 지금 북한에 억류된 국민 6명의
안위, 더 나아가 2천 500만 북한동포의 생존과 인권으로
확장되어야 맞다.
남북경협에 대한 과도한 기대를 관리하지 못할 경우
국민들이 정부에 책임을 묻는 사태가 초래될 수도 있다.
역대 정부가 남북경협에 대한 장밋빛 청사진을 제시하며
다양한 정책을 수립했지만, 중요한 조건은 북한의 비핵화
와 개혁·개방이었다. 핵을 가진 북한을 경제적으로 돕는
것은 상상할 수 없었고, 북한 사회의 개혁 없이 진정한 교
류협력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북한의 비핵화와 변화를
전제로 남북관계의 발전과 동북아의 미래 청사진을 준비
하는 것이라는 한계를 분명히 했었다.
그러나 동북아신경제지도 등 문재인 정부의 큰 그림은
역대 정부의 미래 청사진과 내용은 대동소이하지만 국민
들에게 장래의 비전을 현실의 영역으로 끌어내려 실천할
수 있다는 오해를 준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이는 남북
경협에 대한 국민의 과도한 기대와 투자과열을 유발해서
결과적으로 투자자들의 손실로 이어질 수 있다. 국세사회
의 상식과 규범을 무시한 대북투자로 인해 국가 이미지를
실추하고 국익을 훼손하는 일도 없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