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폭력에 시달리는 한국의 여성과 사회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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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 관리자
  • 작성일 : 2021-08-02 15:57:10
  • 분류 : 자유마당

 

오윤진(한국여성정책포럼 상임대표)

 

 

초등학생 시절부터 이어진 친오빠의 성폭행 사실과 함께 지금까지도 가해자와 한집에 살고 있다고 밝힌 피해자의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글이 최근 사회적 파문을 낳고 있다. 715일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을 보면 성폭행 피해자인 제가 가해자와 동거 중입니다라는 글은 청원 시작 사흘째인 이날 오전 7시 기준 14만여 명의 동의를 얻었다. 글 내용은 인터넷 커뮤니티 등을 타고 확산 중이다. 피해자 A(18) 씨는 초등학교 고학년 무렵 저희 집이 리모델링 공사를 할 때부터 친오빠에게 성추행을 당했다. 성추행은 점점 대담해져서 성폭행이 됐다고 밝혔다.

맞벌이 부모 사이에서 자란 A 씨는 한 살 터울인 오빠에게 정서적으로 의존했는데, 모르는 척 넘겼던 추행은 어느새 성폭행으로 바뀌었다고 했다. 참다못한 A 씨는 피해 사실을 신고했고, 또 다른 추행이 있었던 올 2월에는 자살 시도까지 했으나 부모 뜻에 따라 여전히 가해자와 같은 집에 살고 있다고 한다.

A 씨는 더는 남매가 아닌 피해자와 가해자가 됐음에도 살가움을 요구하는 부모님 밑에서 벗어날 수는 없는가라며 이 사건이 공론화되지 않으면 처참하게 가정으로 다시 돌아가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살아나가야 하기에 마지막 시도라고 생각하고 청원을 올리게 됐다고 했다. A 씨는 20196월 피해 사실을 처음 경찰에 신고했다. 서울경찰청은 지난해 3월 친오빠를 검찰에 기소 의견으로 송치했으며, 검찰은 친오빠를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위반(13세 미만 미성년자 위계 등 간음) 등 혐의로 올해 2월 기소했다. 친오빠는 A 씨를 2016년부터 성추행·성폭행해 온 혐의를 받는다. 이 사건은 현재 서울서부지법에서 재판이 진행 중이다. 수사가 2년 가까이 이어지는 동안 피해자는 병원, 친구 집, 고시원 등을 전전했으나 결국 번번이 친오빠가 있는 집으로 돌아갔다. A 씨는 “(신고 이후) 13개월째 가족과 함

께 지낸다고 말했다.

경찰 관계자는 신고 직후 단기 쉼터에 있던 피해자에게 장기 쉼터 입소를 권했으나 병원 진료 등 스케줄 문제로 자의에 의해 나갔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A 씨는 정신과 진료를 위해 입원하기도 했으나 퇴원하려면 부모님 동의가 필요했다면서 아빠는 제게 집으로 돌아오는 것을 퇴원 조건으로 내세우셨다. 그렇게 집으로 돌아오게 됐다고 했다. A 씨는 국민청원 글에서 올해 2월에도 오빠의 추행이 있었고 저는 화를 냈지만 부모님은 오히려 저를 꾸짖으셨다고 했다. 또 당시 A 씨가 자살을 시도하며 자해하자 주양육자이신 아빠가 제 뺨을 두 차례 내리치셨다고 썼다. 경찰은 올 2월 추행 사건에 대해서는 당시 집에 함께 있던 남매의 부친이 강제추행이 아니었다고 진술한 점 등을 근거로 혐의가 입증되지 않았다고 보고 수사를 종결했다.

A 씨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공론화 요청은) 처음부터 제가 안전하길 바라고 시작한 일이라며 오빠가 반성하고 인정한다면 처벌받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었는데 전혀 반성하지 않았다. 처벌받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법조계·스포츠계에도 성범죄 만연

서지현 검사가 2018129일 검찰 내부통신망에 자신의 성희롱 피해 사실을 올리면서 촉발한 미투(#Me Too·나도 당했다)’ 운동이 시작된 지 벌써 3년이 됐다. 미투 운동은 그야말로 들불처럼 번져나가 각계각층으로 걷잡을 수 없이 퍼졌다. 먼저 문화예술계에서 고은 시인, 이윤택 연출가, 유명 배우와 방송인들의 과거 부적절한 행위가 폭로됐다. 정치인도 피할 수 없었다. 더불어민주당 대권 주자로 꼽혔던 안희정 전 충남지사가 수행비서를 성폭행한 혐의로 법정에 섰다. 2019년 쇼트트랙 국가대표 선수가 성폭행을 당했다고 코치를 고소했다. 빙상계에서 다른 피해사례가 이어졌고, 다른 종목에서도 폭로가 쏟아졌다.

우리나라 초중고생 운동선수 상당수가 성폭력 등 폭력에 시달리고 있다는 조사 결과가 2019년 나왔다. 국가인권위원회가 초중고교 선수 6만여 명을 대상으로 인권실태를 알아보았더니 4%에 가까운 2212명이 성폭력을 당한 경험이 있다고 답했다. 또한 935(15.7%)은 언어폭력을, 8440(14.7%)은 신체폭력을 당한 것으로 드러났다. 심지어 어린 초등학생조차 438명이 성폭력 피해를, 2320명이 신체폭력 피해를 보았다. 이렇게 폭력을 당하고도 별다른 조처 없이 그대로 넘어가는 경우가 많았다. 인권위에 따르면 현실적으로 공적인 피해구제 시스템은 전혀 작동하지 않고 있다.

코치들이나 선배 선수, 또래 선수들에 의한 폭력은 새롭게 밝혀진 일은 아니다. 2019년 쇼트트랙 국가대표 심석희 선수가 고교 시절부터 코치들로부터 성폭행을 당했다고 폭로하면서 체육계의 미투외침이 잇달았다. 빙상계에서 다른 피해자가 나왔고 유도와 태권도 선수들도 피해 사실을 밝혔다. 성폭력 피해 사실 폭로가 줄을 잇자 문화체육관광부와 대한체육회는 가해자에 대한 처벌을 강화하고 훈련장이나 경기장, 라커룸 등에 CCTV를 설치하겠다고 발표하는 등 서둘러 대책을 내놓았다. 그러나 아직까지 별 성과는 없어 보인다.

성폭력을 포함해서 선수들에 대한 폭력이 빈번한 것은 우리 체육계의 부끄러운 자화상이다. 겉으로 드러난 금메달의 영광 이면에는 체육계의 어두운 현실이 존재한다. 모든 국민이 즐기는 체육이 아니라 성적 지상주의에 매몰된 엘리트 체육을 지향하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선수들은 어린 나이에 합숙 훈련에 들어가 폐쇄된 환경 속에서 도제식 훈련을 받는다. 코치와 선수의 관계는 코치가 선수의 앞날을 좌지우지하는 주종의 권력관계로 흐르기 쉽다. 자신의 종목을 평생의 직업으로 생각하는 선수 입장에서는 선수 생활을 지속하지 못할까 봐 폭행을 당해도 참아낼 수밖에 없다. 게다가 용기를 내서 신고한다고 해도 묵인과 방관, 은폐와 솜방망이징계에 그치는 경우가 많고, 폐쇄적 성격 탓에 선수만 2차 피해를 보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그러니 피해를 보아도 많은 수가 해결되리라는 기대를 접고 참고 그냥 넘어가게 된다.

인권위는 보호 체계를 정교화하고 합숙 훈련을 없애며, 체육 특기자 제도를 재검토하고 학생 선수 인권실태 전수조사를 정례화하는 등의 방안을 내놓았다. 그러나 강압적 지도체제와 훈련방식을 당연시하는 체육계의 구조적인 문제를 손보지 못하면 근본적인 해결은 불가능하다. 폭력 근절을 위해서는 체육계 내부의 반성과 각성을 끌어내고 고질적인 폐쇄적 문화를 바꾸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온 국민이 국제대회 우승과 금메달에 열광하는 것은 당연히 그럴 수 있다. 그러나 이를 위해 지금처럼 국가 주도의 엘리트 선수 육성 시스템이 지속한다면 폭력을 비롯한 체육계의 병폐가 사라지기는 어려울 것이다. 과연 엘리트 체육이 지금 시대에 맞는가. 우리 사회가 관심을 갖고 체육의 올바른 방향에 대해 논의하는 것이 필요하다.

 

미투 관련 법안 조속히 입법돼야 피해 예방

최근 유명인들을 향한 미투가 권력형 성폭력문제를 제기한 것과 더불어, 평범한 시민들도 자신의 피해 경험을 털어놓고 있다. 직장, 학교, 친지, 이웃 등 우리 주변 구석구석에 성폭력이 만연해있었다. 심지어 초중고교의 스쿨 미투는 학교도 우리 자녀들을 안심하고 맡길 수 있는 장소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들의 폭로에 대해 시민들은 당신의 잘못이 아닙니다라는 댓글을 달며 위드유(#withyou·당신과 함께)’ 운동으로 지지를 보냈다.

미투는 그동안 당연시 여겨온 남성 중심의 사고방식을 흔들었다. 남녀가 동등한 인권(人權)을 가진 인간이며, 관행이나 문화라고 눈감았던 것들이 문제가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했다. 남성들의 언행이나 회식 문화 등 일상 속에서 미약하나마 변화가 감지된다. 여성들 사이에서 연대의 힘도 보여주었다. 편파 수사를 규탄하는 불편한 용기시위에는 수만 명이 운집했다. 여섯 차례나 계속된 이 시위는 기존 시민단체가 주도하지 않은, 여성들의 자발적인 행동이었다. 그러나 이에 대한 반발도 만만치 않다. 온라인상에서 벌어진 남녀 간 증오와 대립은 오프라인 공간에서도 표출되면서 성 대결과 혐오 양상으로 이어져 또 다른 우려를 낳고 있다. 미투가 한국 사회의 성차별적 위계질서에 의문을 가져온 것은 성과라고 할 수 있겠으나 여전히 가야 할 길은 멀다. 피해 사실을 알렸을 경우 감당해야 하는 ‘2차 피해는 피해자가 당당하게 나설 수 없게 한다.

부당한 사생활 폭로, 조직 내 왕따의 두려움 등이 침묵을 강요한다. 실제로 피해 사실을 고발한 피해자 대다수가 일터를 떠났고, 자신의 일상이 허물어지는 고통을 겪었다. 가장 큰 문제는 성폭력을 뿌리 뽑을 법과 제도가 여전히 미비하다는 사실이다. 미투는 폭로에 그칠 것이 아니라 제도개선으로 이어져야 한다. 물론 법()이 마련돼도 법 해석과 집행 등의 문제는 남는다. 그러나 일단 법부터 만들어져야 피해자들이 성범죄에 적극적으로 대처할 수 있다.

미투 관련법 145건 중 35건만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것으로 알려졌다. 강간죄의 구성요건은 여전히 피해자의 항거 여부에 맞춰져 있다. 조직 내 위력에 의한 성폭력을 처벌할 법안도 만들어지지 않았다. 피해 고발자를 공격하는 수단이 되는 사실적시 명예훼손죄도 아직 살아있다. 폭행이나 협박이 없어도 상대방 의사에 반한 성관계를 처벌하는 비동의 간음죄를 신설한 형법 개정안은 계류 중이다. 국회는 미투 관련 법안 처리를 서둘러야 한다.

우리 사회가 근본적으로 변하지 않는 한 미투는 계속될 것이다. 미투의 열기가 식지 않도록 지속적인 관심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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