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대통합의 요체는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실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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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 관리자
  • 작성일 : 2021-09-03 15:36:09
  • 분류 : 자유마당

국민대통합의 요체는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실천

정의로운 사회되려면 사회 지도층부터 높은 수준의 도덕성 갖춰야

 

송길화(전 광주광역시교원단체총연합회 회장)

 

 

미국의 정치철학자 마이클 샌들(Michael J. Sandel) 하버드대 교수의 저서 정의란 무엇인가2010년 베스트셀러 1위를 기록했다. 인문서가 연간 베스트셀러 1위를 차지한 것은 한국출판인회의가 베스트셀러를 집계한 2001년 이래 처음이었다.

정작 미국에서는 크게 주목받지 못한 이 책이 우리나라에서 인기를 얻은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그만큼 우리 국민이 정의롭고 공정한 사회를 갈망한다는 증표(證票)일 것이다.

정의로운 사회가 이뤄지려면 사회 지도층부터 높은 수준의 도덕성을 발휘해야 한다. 높은 지위와 많은 재산을 가진 사람이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돕는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높은 사회적 지위에 걸맞은 도덕적 의무)는 꼭 유지돼야 하지만 우리 사회의 지도층은 공정사회 구현에 앞장서기는커녕 룰을 깨는 경우가 많았다. 지금은 이처럼 공정(公正)을 허무는 지도층에게 경종을 울려야 할 때다. 그들의 반칙을 엄정하게 엄벌함으로써 그 누구도 사회정의를 허물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줘야 한다. 고위 공직자뿐 아니라 우리 사회 지도층 전반이 합당한 도덕적 의무를 다하는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한층 더 강화돼야만 대한민국이 올바로 설 수 있기 때문이다.

존경받는 사회 지도층이 국가와 사회를 위해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는 모습은 아름답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그동안 인류를 인류답게 유지·발전시키는 초석이 되었다. 동시에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통해 인류는 화합하고 상생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오늘날과 같은 고도의 문명사회를 이룩하게 되었다.

우리 역사에서 나라가 백척간두에 처했을 때 도망가거나 비겁하지 않고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성실히 수행했던 대표적 인물이 충렬공 동래부사 송상현(宋象賢·15511592) 장군과 충무공 이순신(李舜臣·15451598) 장군이다. 그들의 살신성인 정신은 지금도 청사(靑史)에 길이 빛나고 있다.

 

동래부사 송상현 장군

아래턱이 창()에 의해 날카롭게 잘려 나간 남자의 인골. 앉혀진 채로 위에서 세 차례나 살해를 당한 20대 여자의 인골. 조총이 뒤에서 뚫고 나간 흔적을 보여주는 5세 유아의 부서진 두개골. 부산의 한 지하철 공사장에서 발굴된 인골의 모습은 참혹하기 그지없었다. 400년 만에 모습을 나타난 인골들. 대체 이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20056, 부산의 지하철 3호선 수안동역. 이곳은 조선시대 동래성(東萊城) 자리였다. 예리하게 잘려 나간 두개골과 구멍 난 인골들. 2005년부터 2007년까지 3차에 걸친 발굴조사 결과 최소 81개체에서 최대 114개체로 추정되는 인골이 출토됐다.

특히 인골과 함께 발견된 수많은 화살촉과 칼, 갑옷, 창날, 목익(나무 막대기)이 발견돼 눈길을 끌었다. () 주위에 둘러 판 못인 해자(垓子)에 설치되는 목익(木杙)이 수천 개나 발견된 이유는 무엇일까?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동래성의 해자는 놀랍게도 목익과 함께 도심의 지하에 존재하고 있었다. 성을 방어하기 위해 만든 해자가 인골들의 떼 무덤이 되어버린 것이다.

임진왜란 관련 유적에서 유골이 출토된 것은 동래성이 처음이었다. 또한 인골의 개체 수와 인골에 난 상흔의 성격, 그리고 인골의 형질까지 분석한 것 역시 처음이었다.

동래성 전투는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이끈 왜군이 1592(선조 25) 415일 동래성을 공격하면서 시작됐다.

1760년 재야의 화가 변박(卞璞)이 그린 동래부순절도(東萊府殉節圖·보물 392)’에는 동래성을 겹겹이 에워싼 왜군들의 모습과 의연하게 싸우다 죽음을 맞이하는 송상현 부사, 그리고 성 밖으로 말을 타고 도망가는 경상좌도 병마절도사 이각(李珏·?~1592)의 모습 등이 시간대별로 잘 묘사돼 있다. 또한 효종 때 동래부사 민정중(閔鼎重·16281692)이 쓴 임신동래유사(壬辰東萊遺事·1668년 간행)’ 등의 기록을 보면 당시 동래성 전투의 비극을 잘 표현하고 있다.

성은 협소하고 사람은 많은데 왜군 수만이 일시에 다투어 들어오니 성중은 메워져 움직일 수 없을 정도였다

이런 대혼란 속에서 관군은 물론 백성들도 괭이와 도끼, 낫을 들고 백병전을 벌였다고 전한다. 임진왜란은 대륙을 정복하기 위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야욕에서 비롯된 조선침략전쟁이었다. 전쟁 준비가 전혀 없는 가운데 일방적인 침략을 당한 조선의 전란 피해는 매우 컸다. 역사상 한민족이 겪은 최대의 국난이자 가장 충격적인 전란이었다. 전란이 터지자 나라의 근본인 백성들만 버려둔 채 국왕을 비롯해 말단 지방관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이 자신들의 살길만을 찾고 있던 지배층의 무능으로 전쟁은 7년간이나 계속됐다.

전즉전이 부전즉가도(戰則戰矣 不戰則假道). ‘싸우고 싶거든 싸우고, 싸우지 않으려면 길을 빌려 달라는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의 엄포에 전사이가도난(戰死易假道難). ‘싸워 죽기는 쉬워도 길을 빌려주기는 어렵다며 동래성을 지키다 장렬히 순국한 동래부사 송상현 장군의 높은 기개(氣槪)와 조선 민··군의 수성 의지가 빛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必死卽生·必生卽死와 이순신 장군

우리 역사에서 이순신 장군은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상징적인 인물로 평가받는다. 그는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자존심과 윤리의식을 갖춘 선각자로 인정받고 있다. 적의 침입을 효율적으로 방어하면 백성들이 열심히 살게 되어 나라가 발전하게 된다고 한 아담 스미스의 언급처럼 이순신은 자신의 책임을 일찍이 자각하였다. 그가 전라좌도 수군절도사가 되었을 때, 가장 먼저 한 일은 왜적의 침략에 대비하여 각 진()과 포()에 주둔한 수군 기지를 점검하는 일이었다. 그는 공무에 철저했으며, 공정하였다.

이순신은 병서(兵書)를 읽는 등 지식과 덕성을 쌓았으며 동헌에 나가 활쏘기를 하는 등 군인으로서의 본분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는 군기 확립에도 추상같았다. 이순신은 위기에 처했을 때 부하로부터 존경과 신뢰를 받아 대승을 거둘 수 있었다.

이순신은 백의종군에서 1597년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지만, 남은 것은 판옥선 12척 뿐이었다. 당시 망을 보던 자가 와서 보고하기를 수도 없이 많은 적선이 명량으로부터 곧바로 우리 쪽으로 달려옵니다.”하였다. 이순신은 당황하지 않았지만, 12척으로 130여 척의 적을 맞아 싸우게 되었을 때 조선 수군은 두려워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순신은 부하들에게 무릇 반드시 죽고자 하면 곧 살 것이고, 반드시 살고자 하면 곧 죽을 것이다.”(必死卽生 必生卽死)라고 하면서 지휘관으로서의 기품과 위엄을 갖추었다.

이순신은 이미 전날 꿈에서 자신이 반드시 대승하리라는 확신을 갖고 의연한 모습으로 병사들에게 강한 자신감을 피력했다.

병법(兵法)에 이르길 반드시 죽을 각오를 하면 산다고 하였다. 또 한 사람이 길목을 잘 지키면 천명도 두렵게 할 수 있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은 모두 지금의 우리를 두고 하는 말이다. 너희 여러 장령들이 조금이라도 군령(軍令)을 어기면 군율(軍律)대로 시행해서, 아무리 작은 일이라 할지라도 용서하지 않겠다.

15971025일 명량해전(鳴梁海戰)에서 적의 위용에 겁먹은 조선 수군의 두려움을 깨뜨리기 위해 이순신은 직접 대장선을 이끌고 적 함대의 심장부를 향해 천자·지자포를 쏘며 돌격했다. 후방에서 지휘하고 독려해도 될 상황이 아님을 깨달은 이순신은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몸소 실천했다. 이를 보고 나서지 않았던 휘하의 장수들이 이순신의 솔선수범(率先垂範)에 감동했고, 죽을 힘을 다해 싸워 마침내 적을 대파했다. 이순신과 조선 수군은 어려운 상황에서도 2323승이라는 믿기 어려운 신화를 창조했다.

1905년 일본 해군의 전설적인 영웅으로 일컬어지는 도로 헤이하치로(東郷平八郎·18471934) 제독은 귀항하는 러시아 발틱함대를 상대하여 동해에서 대승을 거뒀다. 그런 일본 해군 영웅조차도 일전을 앞두고 이순신 장군의 영정 앞에서 일본이 반드시 이길 수 있도록 간절히 기도했다.

 

6·25 영웅 밴플리트 장군의 위국헌신

창설식이 끝난 직후 우리는 밴플리트 사령관에게서 뜻밖의 소식을 전해 들었다. 아들이 행방불명됐다는 것이다. 전폭기 조종사로 참전한 중위 밴플리트 2세는 전날 밤 B-26기를 타고 군산비행장을 발진해 북한 지역에 야간 폭격 차 출격한 후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 밴플리트 사령관은 이미 이 소식을 알고 식에 참가했으나 평소와 다름없이 태연하게 행동했다. 속은 얼마나 까맣게 타고 있었을지 생각하면 같은 아버지 입장에서 가슴이 저렸다.”

6·25전쟁 영웅인 백선엽(19202020) 장군이 회고록인 군과 나에서 제임스 밴플리트(James Alward Van Fleet, 1892~1992) 8군사령관(중장)이 외아들을 잃은 비극을 묘사한 대목이다.

미국 웨스트포인트(육사) 출신인 밴플리트 장군은 19514월 미8군사령관에 취임했다. 당시 중공군이 춘계 대공세에 나서자 상부에서 서울을 포기하고 한강 이남으로 철수하라라고 권유했다. 하지만 그는 서울을 끝까지 지켜 중공군의 남하를 저지했다. 그리고 1년 뒤 세상에 하나뿐인 아들을 전장에 바치는 슬픔을 겪었다. 당시 아들의 수색 작전 상황을 보고 받은 그는 작전을 중단하라고 지시했다. 아들을 찾느라 적진에 장병들을 보내는 건 위험하다는 판단에서였다. 6·25전쟁 때 혈육을 잃은 건 그뿐만이 아니다. 미군 장성의 아들 142명이 참전해 35명이 죽거나 다쳤다. 월턴 워커(Walton H. Walker, 18891950) 8군사령관도 아들과 함께 참전했다가 같이 전사했다. 마크 웨인 클라크(Mark Wayne Clark, 1896~ 1984) 유엔군사령관(대장)의 아들도 일선 중대장으로 단장의 능선전투에서 중상을 입고 후송됐지만 결국 숨졌다.

영국의 대표적 명문 사립학교인 이튼 칼리지(Eton College)의 졸업생 중 2000여 명은 1, 2차 세계대전에서 전사했다. 대부분 고위층과 귀족의 자제들이다. 아프가니스탄전에 참전한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둘째 손자이자 왕위 계승 서열 3위인 해리 왕손도 이 학교 출신이다. ‘공적인 일에 용기 있게 대처하라라는 이 학교의 교훈(校訓)은 오늘의 영국을 있게 한 정신적 지주였다.

이처럼 노블레스 오블리주 중에서도 위국헌신(爲國獻身)의 가치는 더욱 값지고 고귀하다. ‘국민대통합의 요체(要諦)는 바로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실천이다. 이는 어떤 국난도 극복할 수 있는 국가 단합을 이뤄내고 공정하고 정의로 사회를 앞당기는 원동력이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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