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관계 경색의 배경과 현안 - 호사카 유지 세종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 No : 2569
  • 작성자 : 관리자
  • 작성일 : 2019-07-02 16:23:48
  • 분류 : 자유마당


언제부터 한일관계는 경색되었는가? 사실 한일관계
는 항상 독도 문제, 위안부 문제, 역사인식 문제 등
으로 좋았다가 금방 악화되어 다시 좋아졌다가 다시 악
화되기를 반복했다. 그런데 최근의 한일관계는 1965년 국
교정상화 이래 최악이라고 흔히들 말한다. 그만큼 한일
관계의 근간과 관련된 위기가 감지되어 있다. 그런 뜻에
서 최근의 한일관계는 미증유의 위기로 규정할 수 있다.
그 배경에는 변화하는 동북아 정세가 있다. 가장 큰 것
은 남북관계가 개선되어 일진일퇴는 있지만 남북이 평화
공존으로 갈 수 있는 상황이 계속되고 있다는 사실이 한
일관계에 큰 영향을 주고 있다. 남북이 평화공존으로 가
면 일본으로서는 사실상 남북통일로 간주할 수밖에 없
다. 평화공존 국면에서 남북이 대 일본 외교에 있어 한 목
소리를 낼 가능성이 있다. 그럴 경우 남북의 목소리는 이
제 일본이 통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니게 되어 한반도가 완
전히 일본의 영향 하에서 벗어나 버린다.
일본의 한반도정책에 초점을 맞춰서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겠다.
1945년 패전한 일본은 한반도에 대한 ‘부당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게 되었고 그것을 받아들인 새로운 보수가
일본을 통치하게 됐다. 그들은 ‘보수본류’로 불리는 사람
들이고 평화헌법을 지키고 일본의 경제성장을 골자로 하
는 외교정책을 수립해 자위대라는 경무장에 만족하여 군
사력을 미국에 의존하려는 세력이다.
한동안 일본에서 총리가 된 사람들은 일부를 제외하고
거의 이런 보수본류에 속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한일
관계가 악화되어도 그들은 관계를 수복하려는 노력을 보
였다.
일본 내 ‘보수 비주류’의 역사 왜곡
‘혐한’의 시작
그런데 1945년까지 일제를 움직인 사람들의 계열이 다
시 힘을 갖게 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그것이 바로 위안
부 강제동원을 인정한 ‘고노담화’ 발표와 이와 동시에 참
의원선거 패배로 자민당 정권이 한때 ‘비자민당 정권’(호
소카와 총리 시절)으로 교체된 1993년이다. 한국에서는
2009년 9월의 민주당 하토야마 정권 성립을 ‘54년 만의 일
본 정권교체’라고 언론들이 보도했으나 이미 자민당정권
은 1993년 7월에 38년 만에 비자민당 정권으로 한때 정권
이 교체된 사실이 있다.
이 사건이 계기가 되어 ‘보수 본류’가 아닌 ‘보수 비주류’
들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들은 보수우익의 색채
를 강하게 내지 않는 한 다시 집권할 수 없다는 절박한 심
정으로 극우적 운동을 시작했다. ‘보수 비주류’는 보수 본
류와 정반대의 주장을 내세웠다. 그들은 일본이 침략국
가가 아니었다고 주장하고 헌법을 개정해 정식군대를 갖
는 보통국가로 일본을 바꾸자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보
통국가로 가는 헌법 개정을 위해 그들이 우선시한 것은
고노담화로 일본의 모든 중학교 사회과교과서에 실린 위
안부문제를 부정하는 작업이었다.
일본군을 부활시키기 위해 보수 비주류는 일본군의 최
악의 범죄인 위안부 문제를 왜곡·은폐하려고 한 것이다.
그것을 위해 비주류들은 자민당 안에 역사검토위원회를
발족시켰고 위안부는 성노예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매춘
부가 된 사람들이라는 왜곡을 본격화시켰다. 이것이 ‘혐
한’의 시작이었다. 그런 운동의 일환으로 자민당 내 역사
검토위원회는 역사왜곡을 일삼은 ‘새 역사교과서를 만드
는 모임’을 후원했다. 그들이 ‘일본회의’라는 극우파 민간
단체와 연계하면서 자민당 내 비주류세력들이 더욱 힘을
갖기 시작했다.
그 운동의 일각에 아베신조(安倍晋三) 당시 국회의원
이 있었다. 그는 45년까지 일제를 이끈 인물 중 한 사람이
자 ‘만주국 건설 3인방’ 중 한사람이기도 한 기시 노부스
케(岸信介) 전 수상의 외손자이자 현 일본 총리다. 이처럼
위안부 문제를 부정한다는 동기를 중심으로 모인 일본의
보수 비주류가 본격적인 자신들의 정치 세력화를 시도하
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1994년 사회당과의 연립으로 재집권한 자민당
은 아직 비주류 인사를 총리로 추대하지 못했다. 비주류
들의 움직임과 평행해서 자민-사회당 연립정권은 1995년
무라야마 담화를 발표해 일본의 과거 침략전쟁과 식민지
지배를 공식으로 사죄했고 1998년에는 김대중 대통령-오
부치 총리 회담으로 ‘한일파트너십’을 선언해 일본이 가
해자였고 한국이 피해자였음을 인정해 처음으로 일본의
사과를 공식 문서화시켰다. 그 뒤에서 비주류들은 자신
들의 주장을 관철시키려는 준비를 진행하고 있었다.
보수 비주류들의 활동이 가시화된 것은 오부치 총리가
과로로 갑작스럽게 사망한 다음 밀실합의로 등장한 모리
요시로(森喜朗) 총리 시대부터였다. 극우적인 발언을 서
슴지 않았던 모리 총리 다음은 그의 영향 하에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가 총리가 되었고 그는 원래 보수
본류 라인에 있는 인물인데도 야스쿠니신사 참배를 고집
해 한국, 중국과 크게 마찰을 빚었다.
이때 야스쿠니신사 문제로 한일관계는 상당히 악화되
었지만 2002년 한일 월드컵 공동개최와 일본에서의 ‘한류
붐’으로 위기를 넘기기는 했다. 그런데 2005년 시마네현
의회가 ‘다케시마의 날’을 정해 한일관계는 다시 암전하
기 시작했다. 그뿐만이 아니라 고이즈미 정권의 관방장
관이 된 아베 신조는 독도 문제로 심하게 한국을 도발했
다. 그는 2006년 4월 독도영해 12해리에 일본 해상자위대
소속 순시정 2척을 일방적으로 침입시키겠다고 한국에
통보해 독도에서 ‘분쟁’을 일으키려고 시도까지 했다.
이에 노무현 정부는 16척의 경비정을 독도 12해리 지점
에 동원시켜 일본과 대치했다. 결국 한일 외교차관 회담
에서 위기를 진정시켰으나 이때 독도문제는 최악의 위기
를 맞이했다.그 후 2006년 9월 비주류의 상징인 아베 신
조의 ‘제1차 아베내각’이 출범했다. 제1차 아베내각은 아
베총리의 미숙함도 있어 1년으로 끝났으나 2012년 12월
아베 신조는 제2차 내각을 출범시키는 데 성공했다. 제2
차 아베내각은 일본의 침략 사실을 부정하고 ‘다케시마의
날’에 정부고위인사를 시마네현에 파견하면서 사실상 ‘다
케시마의 날’을 국가적 행사로 승격시켰다. 그리고 2013
년에는 아베 총리 스스로가 야스쿠니신사를 참배했고 일
본의 침략전쟁을 미화하는데 선두에 섰다.
아베 총리는 위안부 강제동원을 인정한 고노담화를 검
증한다고 하면서 2016년 담화를 사실상 사문서로 만들었
다. 일본 자민당의 비주류화, 즉 일제 강점기의 이념을 가
진 아베내각의 출범과 장기집권은 한일관계가 악화된 근
본적인 요인이다.
그럼 한국 측에 초점을 맞춰서 한일관계 악화의 요인을
검토해 보자. 현재의 한일관계 현안들은 계속 존재해 왔
지만 일본과의 본격적인 마찰이 시작된 것은 이명박 정
부 시절이다. 2012년 5월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신일철주
금(옛 신일본제철)을 제소한 재판에서 한국 대법원은 원
고 승소판결을 내렸다. 이에 피고 일본기업 측이 상고했
고 확정판결은 원래 박근혜 정부 시절에 내려질 예정이
었으나 소위 ‘재판거래’로 확정선고가 문재인 정부 시절
인 2018년 10월로 늦어졌다.
제2차 아베내각
야스쿠니신사 참배 등 침략전쟁 미화해
이 문제에 대해 한국 측 잘못이 있다면 한국의 사법적
정당성을 별로 주장하지 않고 가만히 있다는 데 있다. 이
문제에 대해 일본 측은 아베정권, 자민당 인사들, 우파언
론 등이 매일같이 한국 대법원 판결의 부당성과 문재인
정권의 무성의함을 비판하고 있다.
이에 한국 언론의 대부분이 정확한 논리적 정당성을 보
도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 바로 국제 여론전에서 밀려 있
다는 점에 문제가 있다. 개인청구원은 국제법상 소멸이
되지 않는다는 것은 1991년 일본정부자체가 인정한 사실
이다. 이번 판결문제에 있어 한국 측 정당성을 입증할 단
서들이 많은데도 한국정부와 언론들이 너무나 논리전에
소극적이다.
특히 일본의 보수 비주류는 1945년까지 그랬듯이 항상
상대국가에 문제가 있다는 논리전을 펼치고 일본국민들
을 하여금 상대국가를 향해 분노하게 만들어 그런 국민
적 분노로 상대국가에 대한 공격적 자세를 취해 온 게 역
사적 사실이다. 위안부 문제를 보면 2012년 8월 헌법재판
소가 이 문제에 대해 한국정부가 적극적으로 해결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다는 취지의 판결을 내렸기 때문에 이
문제 해결을 위한 한국정부의 본격적인 움직임이 시작됐
다. 이명박 정부의 해결 요청에 따라 당시 일본 민주당의
노다 요시히코(野田佳彦) 총리는 어느 정도의 성의를 보
였으나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일본 측의 법적책임을 인정
하지 않았고 일본 측에 문제가 있다면 어디까지나 인도
적 차원의 책임만 인정할 수 있다고 하여 한일 간 합의는
결렬됐다.
그리고 박근혜 정부가 법적책임을 인정하지 않는 일본
측 방안을 수용해 버려 외교적 참사를 일으키고 말았다.
박근혜 정부는 일본이 제시한 10억 엔이라는 보상금으로
위안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지 그동안의
한국 측 주장을 스스로 부정한 위안부 합의를 체결(2015.
12. 28)함으로 큰 외교적 오점을 남겼다. 이후 현 문재인
정부는 사실상 위안부 합의를 백지화시켰고 표면적으로
는 양국 간의 합의를 한국 측에서 깼다는 비난을 일본정
부로부터 받아야 하는 신세가 됐다.
또 하나의 큰 현안은 독도 문제인데 일본은 계속 ‘독도
도발’을 해 왔다. 특히 2005년 3월 전술한 바와 같이 시마
네현 의회가 ‘다케시마의 날’ 조례안을 통과시켜 한국에
대해 강한 도발을 시도했다. 이후 일본 정부는 2008년 5월
중학교 사회과 신 학습지도요령 해설서에 독도를 처음으
로 ‘일본영토’라는 취지로 기재했고 이후 계속 초·중·고
사회과 교과서에 독도를 일본영토로 기재해 한국을 자극
했다. 계속되는 일본의 독도도발에 2012년 8월 이명박 대
통령이 한국 대통령으로는 처음으로 독도를 방문해 이
사건으로 한일 간의 독도갈등은 극에 달해 버렸다. 일본
이 교과서나 외교청서, 방위백서 등에 독도를 일본영토
라고 썼다고 하면 한국도 이에 상응하는 조치, 바로 한국
교과서의 독도기술을 좀 더 구체화시키거나 한국의 국방
백서 상 독도기술을 늘리거나 하는 상대주의적 대응을
했었어야 하는 것이 외교의 원칙이었으나 최고지도자가
독도를 방문함으로 한일관계는 그때도 사상 최악의 상황
으로 치닫고 말았다.
이렇게 볼 때 일본 측의 문제는 독도, 위안부, 강제징용
자 문제 등 한일 간의 현안에서 한국에 절대 양보하지 않
는, 1945년 이전의 정권과 맥을 같이 하는 비주류 아베정
권이 들어서 있다는 것이 한일관계 악화의 근본요인이고
한국 측을 보면 외교적 미숙함이 한일관계 악화에 일조
했다고 볼 수 있다. 결론적으로 한국은 일본 정권의 성격
파악과 상대주의에 입각한 대응전략으로 한일관계 개선
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으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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