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의 참혹한 진실과 자유의 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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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 관리자
  • 작성일 : 2020-06-01 14:15:58
  • 분류 : 자유마당

6·25전쟁의 참혹한 진실과 자유의 가치

김일성 선제공격으로 개전3년 끌며 분단구조 굳혀

 

이성로 근현대사연구가

 

지난 70년 동안 남북은 한반도에서의 유일 합법정부로서 역사적·실체적 정통성을 국내외적으로 인정받기 위해 제각기 노력해 왔다. 북한은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으로 통일정부 수립이 좌절됐다고 남한 책임론을 펼쳐왔고, 남한은 UN 감시하에 남북한 총선거를 실시하고자 했는데 UN 선거감시단의 입북을 북한이 거부하는 바람에 선거가 가능한 남한 지역에서만 총선거를 실시할 수밖에 없었고 남한만이 유엔이 인정한 유일 합법 정부라고 강조해 왔다.

남북은 한반도 분단 과정에서 제각기 통일정부 수립을 위한 노력을 시도하다가 미·소간 냉전체제 심화로 장벽에 부딪치자 전쟁을 통해서라도 통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하게 됐고, 북한이 외세의 도움(중국과 소련)으로 전면전을 일으킨 것이 6·25였다.

전쟁 과정에서도 남북은 상대에 대한 완전한 군사적 점령을 통한 무력 통일을 시도하지만 이같은 시도는 참혹한 피해만을 남긴 채 휴전으로 인해 포기됐다. 지난 70년 동안 남북은 첨예한 군사적 대치 속에서도 나름의 통일방안을 구상해 상대에게 적용하고자 다각적으로 시도해 왔다. 미국 워싱턴시 링컨기념관 옆에는 6·25전쟁에 참전한 미군의 명예를 기리는 한국전쟁기념탑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비를 맞으며 행군하는 미군들의 모습이 조각되어 있고 기념비에는 자유는 공짜가 아니다(Freedom is not free)."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6·25전쟁에서 국군은 전사자 137899, 부상자 45742, 실종 및 포로 32838명의 피해를 보았고, 미군은 전사 54246, 실종 및 포로 15317, 부상 103284명의 피해를 보았다.

 

소련의 발빠른 남진에 미군 개입해 분단 시작

우리 힘으로 온전한 해방을 쟁취했으면 분단은 아예 없었을 것이다. 원래 1939년 제2차 세계대전 개전 이전에 식민지가 된 지역은 해방에서 제외하는 것을 원칙으로 카이로에서 연합국 수뇌들의 협의가 있었는데, 한국은 예외로 해방시키기로 하면서 한국의 해방 문제가 거론됐다. 이어 조선 내 일본군의 효율적 무장해제와 조선 민족의 자치능력 확보를 전제로 연합국에 의한 한시적 신탁 통치가 얄타회담에서 논의됐다. 이 과정에서 미국은 소련의 극동 관련 영토적 야심을 읽게 된다.

2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국이 승리하는 가운데 소련이 세계사회주의화의 야욕을 드러내면서 한반도 적화 내지 분단은 잉태됐다. 스탈린은 동유럽 국가들의 공산화와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 지역의 공산화를 구상하게 된다.

194586일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을 맞은 일본은 815일 히로히토의 라디오 성명으로 항복을 발표하게 된다. 만주 영토 확보를 염두에 두고 19457월까지 최정예 소련군을 극동으로 이전시켰던 스탈린은 89일 일본이 나가사키에 원폭을 맞자 곧바로 대일전 참전을 선언하고 만주와 조선을 향해 진격을 개시하게 된다.

당시 극동지역에는 일본의 패전으로 인한 주인이 불분명한 땅이 엄청나게 있었다. 몽골이 1564000, 만주가 123, 조선이 22, 일본에 빼앗겼던 사할린이 76,000이었고 이를 다 합치면 무려 310나 됐다. 이 땅을 차지하면 극동에서도 패권을 장악할 수 있었다.

89일 소련은 총병력 157만명, 탱크 1500, 자주포 1840, 전투기 1400대로 3개 축선으로 밀고 내려 왔다. 한편 미국 트루먼 대통령은 대일전에서 미군의 군사적 희생이 크게 증가하자 소련군의 대일전 참가를 권유해 왔으나, 막상 소련군이 참전을 선언하고 남하를 시작하자 이를 견제할 필요를 느끼게 된다. 소련군이 813일 나진에 들어오고 16일 청진에 들어오면서 기차로 서울로 진격한다는 소문이 일자 미국은 극동 교두보 마련 차원에서 한반도 진주를 검토하게 된다.

미국은 다급하게 소련에 대해 한반도 분할 신탁통치를 제안하고 소련이 이에 응함으로써 따라 38선 분할이 합의 되고 남북에 군정이 들어서게 된다. 북한 지역은 소련군이 고문정치를 통해 관여하고 실제 통치는 인민위원회를 중심으로 자치를 실시해 실제로 4628일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라는 사실상의 단독정부를 발족시킨다. 남한에서는 4881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 시까지 미군정이 실시됐다. 단독정부 수립은 소련 군정하에서 북한이 먼저 한것이었다.

 

해방공간에서 좌우 대립 심화

해방공간에서 일제로부터 행정권을 이양받을 만한 세력 으로는 여운형의 건국준비위원회(이하 건준)가 유일했다.

19458월 들어 일제의 패망이 예상되자 여운형은 건준을 전국조직으로 확대하면서 해방 이후를 적극적으로 준비하게 된다. 815일 오전 여운형은 조선총독부 엔도 총감과의 면담에서 일제패망 이후 조선의 행정권과 치안권을 자신에게 달라고 요구하고 엔도는 일본 사람들의 안전 귀국이 초미의 관심사였기 때문에 행정권은 유보하고 우선 치안권만 넘겨주겠다고 약속하게 된다.

엔도 총감으로부터 치안권을 넘겨받은 여운형은 건준 산하에 인민위원회를 구성하고 경찰서·지서별로 자체적으로 치안대를 구성하게 된다. 여운형 입회하에 816일 서대문형무소와 마포 형무소 양심수들이 풀려나고 지하에 있던 공산당 세력까지 합류하면서 건준은 좌파적 성향이 대폭 강화된다.

이어 미군이 남한에 들어오면서 건준의 좌파적 성향에 대해 우려한 나머지 미군정은 치안권을 다시 회수하고 대부분의 일제 경찰을 재고용하면서 건준 산하에 구성된 치안대와 대립하게 된다. 47년 공산당 불법화 이후 공산당 세력과 치안대 세력은 각종 단체나 기업, 군대 내부에 스며들어 반군정세력으로 급증하게 된다.

공산당 불법화 과정에서 1947년 박헌영은 4710월 영구 월북할 때까지 7차례 월북해 김일성을 면담하고 남한에서의 극좌투쟁을 공언하게 된다. 여운형도 477월 암살될 때까지 5차례 월북해 김일성을 면담하면서 박헌영의 극좌 모험주의가 남한에서 좌파의 활동공간을 좁히고 있다고 하면서 박헌영과 좌파의 주도권 경쟁을 벌이게 된다.

박헌영 등 강성 공산당원들의 추동으로 발생한 해방공간에서의 전국 총파업, 대구 폭동, 제주 4·3항쟁, 여순 14 연대 반란사건 등이 일어나고 공산당원들이 공무원과 자산가, 경찰관과 그 가족들을 극히 잔인하게 살해하는 과정에서 보복이 보복을 불러 수만명에 달하는 엄청난 민간인들의 희생이 뒤따르게 된다.

6 ·25전쟁 과정에서도 수많은 민간인 학살이 자행되는데 주로 북한군과 북한에서 내려온 공산당, 그들을 도운 남한 좌익과 빨치산들이 저질렀고 북한지역에서의 학살은 패주하는 북한군 및 공산당 세력이 주범이었다. 북한군이 점령한 남한지역에서는 인민재판이 벌어져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공무원, 경찰관, 과거 치안대 박해세력 등을 색출해 즉결 처형했다.

북한군의 철수과정에서 교도소 재소자 피살, 인민재판 등을 통해 처형된 민간인 피살자는 모두 128936명으로 서울이 8800, 전북 14216, 전남 69787명 등 전라도 지역이 특히 많았고 영광군의 경우 21225명의 민간인이 피살됐다. 북한군이 패주하면서 북한지역에서 자행된 민간인 학살은 약 172000명 정도 되는 것으로 보고됐다.

 

, 민간인학살·납치 등 전쟁범죄 자행

북한군이 남치해간 납북자 수는 모두 84532명으로 개전 초 서울 점령시에 납북된 사람이 8661명이었고 1·4후퇴 때 납북된 사람이 3971명이었다.

6 ·25전쟁 발발을 두고 그동안 많은 논란이 있어 왔다. 북한은 아직도 남쪽의 공격에 대한 북한의 반격으로 전 쟁이 시작됐다고 주장한다. 1980년대 이래 한국의 학계와 사회에서도 이른바 수정주의 학자들을 중심으로 자연발 생적 내전설이 광범위하게 유포됐다. 그러나 냉전 종식 이후 소련에서 나온 기밀문서와 중국의 관련 문서들은 이 시각이 완전 허구였음을 여실히 드러내 보여주었다.

당시 남북한 군대의 무장 수준은 전면전을 치르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어림없는 수준이었다. 북한의 김일성과 박헌영은 19493월과 19503월 두 차례에 걸쳐 소련 스탈린을 면담하면서 조국해방전쟁개전을 제안하고 지원을 요청했다. 이에 대해 스탈린은 전쟁을 단기간에 끝낼 수 있고 미국이 개입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있어야 만 남침이 허용될 수 있다고 하면서 요청을 거절했다. 그러나 19498월 남한에서 미군의 철수, 4910월 중국에 중화인민공화국이 창설되고, 501월 딘 에치슨 국무장관이 미국 방위에서 한반도를 제외한다는 에치슨 라인을 선포하는 등 동북아 정세가 바뀌자 태도를 바꿔 지원이 가능할 수도 있다는 입장을 보인다.

스탈린은 김일성과 박헌영이 미국은 전쟁에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고 자신있게 말하자, 중국의 마오쩌둥에게 유사시 중국군을 파병하겠다는 약속을 받아오라고 지침을 주었다. 50513일 마오쩌둥은 스탈린에게 공문을 보내 소련이 한반도에서의 전쟁을 승인했는지 문서로 확인을 받고 중국의 입장에서는 스탈린 대원수의 승인도 있고 하니 우리도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6 ·25 ‘자연발생적 내전설등 허구성 입증

김일성은 마오쩌둥에게 북한군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중국의 지원이 필요하다고 요청해 19497월부터 1950 4월까지 중국 인민해방군 내 조선인 부대 3개 사단 35,000명을 파병 받아 인민군 6사단과 5사단, 12사단으로 개편해 전선에 배치했다. 소련도 전쟁에 필요한 무기와 장비를 19505월 말까지 북한으로 보냈다. 처음에는 옹진반도의 섬을 선제공격해 남한으로부터의 공격을 유발한 다음 그것을 명분삼아 71일에 개전하기로 했으나 비밀 누설의 우려 때문에 1주일을 앞당겨 625일 전면 공격을 개시하게 됐다.

625일 새벽 기습 남침을 감행해 파죽지세로 밀고 내려온 북한군은 개전 사흘 만에 서울을 함락시키고 물밀 듯이 낙동강까지 밀고 내려갔다. 625일 개전 직후 전면 남침 보고를 받은 미국 트루먼 대통령은 곧바로 유엔 안보리를 소집해 연합군을 형성, 한국전에 파병하기로 의결을 유도하고 곧바로 미군을 한국전에 파병하게 된다.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허리에 비수를 맞은 북한군은 패주하기에 바빴는데 낙동강 전투에 참전했던 많은 수의 북한군이 대오를 이탈해 도주했다. 북한은 낙동강 전투가 장기화하면서 사상자가 다수 나오자 남한 점령지에서 강제 징집한 의용군을 집중 투입했다. 낙동강 전투에서 국군이 2,300명 전사하고 북한군이 5,690명 전사했는데 이들 대부분이 의용군이었다.

101일 국군이 38선을 넘어 진격을 개시하자 김일성은 스탈린과 마오쩌둥에게 새로운 지원 요청을 하게 된다. 마오쩌둥은 소련 공군의 지원을 전제로 지상군 파병을 결정하게 되는데 두 사람의 생각은 달랐다. 스탈린은 한국전은 중국의 지원에 맡기고 동유럽 공산화에 더 주력하는 쪽으로 정책을 선회했다. ·중이 맞붙으면 전쟁이 장기화될 것이고, 그러면 미국이 관심을 유럽으로 돌릴 수 없게 될 것이며, 중국 또한 국력이 약화되어 5,000에 달하는 중소 국경선이 안정될 것으로 보았다.

한편 마오쩌둥은 국공내전 중에 장개석 군대 패잔병으로 중국군에 새로 편입된 항복군 200만명 있어 이들이 근심거리였는데, 이들을 한국전에 파병해 인해전술을 통해 소모시킴으로써 후환을 없앨 수 있는 좋은 기회로 삼았다. 중국군은 총 300여만 명이 참전했고 53년 휴전 직전에는 130만 이상이 동시 파병되어 있었다. 그들 가운데 약 90% 이상이 과거 장개석 군대 출신이었다. 이들 가운데 148600명이 전사하고 798400명이 부상하고, 25600명이 포로가 되거나 실종됐다. 1950111일부터 한국전에 참가한 소련의 2개 항공사단은 유엔군과 국군을 공격했다.

 

남북-미중소 복잡한 구도결국 휴전

휴전협정에 임하는 자세 또한 남북과 미중소가 제각기 달랐다. 전쟁 장기화로 전비 마련이 어려워진 김일성은 스탈린과 마오쩌둥에게 조기에 전쟁을 끝낼 수 있도록 조치해줄 것을 요청하게 된다. 이에 대해 스탈린은(미중 이 최대한 국력을 쏟아 부을 수밖에 없도록) 휴전을 최대한 늦출 것을 주문했다. 미국이 한국전에 함몰되어 있어야 동유럽 공산화와 안정화가 쉬워지기 때문이었다.

중국은 한국전 참전으로 발전이 20년 후퇴했을 정도로 국력 손실이 초래됐다. 미국 또한 전쟁 장기화로 인한 내부 여론 악화로 조기 휴전을 밀어붙이고 있었고, 남한의 이승만 대통령은 이 전쟁을 북진통일의 계기로 삼아야 하고, 향후 북중소의 연합 도발에 대비한 안전판 마련 차원에서 휴전을 늦추자는 입장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27,092명의 반공포로 석방을 감행하면서 미국을 압박해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이끌어 냈다.

6 ·25전쟁 중에 자유를 찾아 남하한 북한 주민은 어림잡아 50만 명 정도로 추정되고 있다. 폭파된 대동강 철교를 타고 약 5만 명의 주민들이 남하했으며, 장진호 전투 이후 후퇴하는 국군과 유엔군이 모여든 수천명의 피란민을 이끌고 120나 떨어진 흥남항까지 이동한 다음, 모여든 10여 만명의 피란민들을 1212일부터 1222일까지 100여척의 군함과 상선을 이용해 86000명을 안전하게 수송한 흥남철수가 있었다. 근처의 원산항과 성진항에서도 12100명의 피란민들을 안전하게 수송했다.

 

아픈 역사 딛고 상생의 미래 열어야

우리 정부는 민족 동질성 회복과 평화증진, 통일의 토대를 마련해 간다는 측면에서 지속적으로 남북교류협력 을 추진해오고 있다. 남북한 교류협력을 통해 지난 70여년 동안 이질화된 문화적 차이를 극복하고 상생의 남북 관계를 구축함으로써 북한을 국제사회의 건강한 일원으로 동참시키고 남북이 함께 발전 번영하면서 통일의 초 석을 놓아가고자 노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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