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서기의 심리학, 줄 세우기의 경영학 - 신중섭 강원대학교 윤리교육과 교수

  • No : 2527
  • 작성자 : 관리자
  • 작성일 : 2019-06-04 10:13:22
  • 분류 : 자유마당

줄서기가 화제다. 블루보틀 1호
점이 성수동에 문을 열자 한잔
의 커피를 마시기 위해 많은 사람들
이 줄을 섰다. 심지어 커피 한잔을 위
해 5시간씩 줄을 서기도 했다. 커피계
의 ‘애플’로 통하는 블루보틀 앞에 늘
어선 긴 줄이 ‘줄’에 대한 사람들의 관
심을 불러일으켰다. 줄서기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최근에 등장
한 새로운 형태의 긴 줄에 사람들이
주목하기 시작한 것이다.
구소련 국민들은 생활필수품을 구
하기 위해 연간 400억 시간 줄을 섰다
는 이야기도 있다. 전체 인구 가운데
어린이, 학생, 노약자 등을 제외한 사
람들이 1인당 연 200시간 이상 줄을
섰다는 것이다. 가정 경제를 책임진
주부들은 어디를 가다가도 줄만 보이
면 맨 뒤에 서서, 하루에 줄 서는 시
간이 5시간이 넘었다고 한다. 생존을
위해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
이다.우리도 구소련만큼은 아니지만
줄서기 기억은 과거로 갈수록 더 풍
성하다. 웬만한 사람이면 자기가 필
요한 것을 구하기 위해 오랫동안 줄
을 설 수밖에 없었던 기억이 많다. 줄
서기와 관련된 대부분의 기억은 유쾌
하지 않다. 과거의 줄서기는 지루함
과 짜증을 동반한다.
화장실이 집에 없어 공중화장실 앞
에 줄을 서서 발을 동동거리며 기다
리거나, 수돗물이 공급되지 않아 공
중수도 앞에 줄을 서서 하염없이 기
다리거나 귀성 열차표를 구하기 위
해, 전철 표를 끊기 위해, 은행에서
현금을 찾기 위해 줄을 서서 기다린
경험을 나이 든 사람들은 대부분 가
지고 있다. 생활을 위한 불가피한 줄
서기다. 줄서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없지만, 줄서기는 도덕적으로 후한
대접을 받아왔다.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리는 것을 무엇보다 공정하다
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공정함은 ‘먼
저 온 사람이 우선’이라는 간단한 원
칙이다. 선착순 원칙이 무너지고, 누
군가 공정함을 해치면 사람들은 분노
하고 저항한다. 줄서기에서 공정함을
찾는 사람들은 절대로 ‘새치기’를 허
용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새치기는 불공정하기 때문에 도덕
적으로 나쁜 것이다. 따라서 이들은
전통적으로 줄서기로 순서를 정했던
영역에 시장 논리가 들어오는 것을
도덕적으로 반대한다. 공연표를 구하
기 위해 사람을 구해 대리로 줄을 서게
하는 것이나 공항이나 놀이공원에서 추
가요금을 받고 합법적으로 새치기를 허
용하는 것은 ‘선착순’이라는 ‘줄서기 윤
리’의 파괴로 여긴다.
그러나 경제학자의 입장에서 보면
줄서기는 문제가 많다. 그들은 실시
간 수요가 실시간 공급을 초과해서
줄이 생긴 것으로 설명한다. 따라서
그들은 긴 줄을 가격 체계가 수요와
공급을 조절하는데 실패하고 있다는
증거로 여긴다. 사람들이 자신에게
필요한 재화와 서비스를 확보하기 위
해 길게 줄을 서는 것은 낭비다. 따라
서 줄을 서게 할 것이 아니라 더 빠른
서비스를 받기 원하는 사람들이 그렇
게 할 수 있도록 가격을 차별화하여
경제적 효용을 높이는 것이 바람직하
다고 주장한다. 경제학자의 관점에서
보면 사람을 사서 대리로 줄을 세우
거나 추가 요금을 낸 사람에게 놀이
공원이나 공항에서 우선순위를 부여
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런 논란과 무관하게 새로운 형태
의 줄서기 문화가 출현했다. 스마트
폰 신제품이 출시되는 날이면 그것을
사기 위해 사람들은 전날부터 줄을
선다. 해리 포터와 같은 인기 있는 책
이 출간될 때에도 한밤중에 줄을 서
서 기다린다.
이 경우에는 수요와 공급의 불균형
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공급은 충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사
기 위해 줄을 서서 마냥 기다리는 이
유는 출시 첫날 손에 넣기 위해서다.
단지 다른 사람보다 좀 더 빨리 원하는
물건을 갖기 위해 줄을 선다. 얼마나
오래 기다려 물건을 샀는가 하는 것 자
체가 자랑거리가 된다.
이 현상을 하나의 이론으로 단순하
게 설명하기는 어렵다. 인스타그램에
사진을 올리면서 젊은이들이 쓴 글을
보면 블루보틀을 통해 과거 유학시절
을 회상하기도 하고, 뉴욕에서 먹어
본 맛과 다르다거나 동경에서 마셨던
커피가 더 맛있었다고 말한다. 블루
보틀 디자인에 끌렸다거나 컵을 수집
하기 위해 가기도 한다. 꼭 커피를 마
시기 위해 갔다고 할 수는 없다.
기다리면 기다릴수록 충족감이 올
라가고, 반복되는 따분한 일상에 활
력을 제공하는 줄서기다. 새로운 상
품이나 한정품을 사기 위해 밤샘을
하고, 맛집 앞에서 기다리는 사람들
이 늘어난다. 이런 현상을 ‘기다림의
미학’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기다림
의 미학에 빠진 사람은 경제적 계산
을 하지 않는다. 기다리면 기다릴수
록 성취감이 올라간다.
몇 년 전 서울 청담동 한 매장에서
는 ‘루이비통×슈프림 팝업 컬렉션’
을 구입하기 위해 1000여 명이 매장
앞에서 3일 밤낮을 샜다고 한다. 오랫
동안 기다려 원하는 물건을 쟁취하는
성취감은 오랜 기다림을 참고 견디
게 하는 원동력이 된다. 이런 사람들
이 “각 브랜드가 한정판 제품을 소량
만 판매하는 것이 고도의 마케팅, 다
시 말해 상술이라는 것”을 모르는 것
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소
한 물건을 손에 넣기 위해 줄서는 괴
로움을 즐겁게 받아들인다. 줄서기를
하면서 마니아들은 서로 동질감을 느
끼며 자기가 구한 귀한 물건을 과시
하기도 한다.
이런 새로운 현상을 전문가들은
“젊은 사람들의 보편적 욕망이 투영
된 물건이나 장소에 줄을 서는 것은
일종의 놀이이자 자랑거리”로 해석한
다. 커피집 앞의 긴 줄에 동참하는 이
유는 커피를 마시는 것이 목적이 아
니라, 남보다 먼저 마시고 싶은 욕망,
마시고 나서 사진을 찍어 SNS에 인증
샷을 올려 자랑하고 싶은 욕망이 작
용한다는 것이다.
기다림 자체가 자랑거리이자 콘텐
츠가 된 것이다. 같은 곳에서 줄을 섬
으로써 서로 동질감을 느끼고 취향
공동체가 된다고 해석하는 ‘줄서기
심리학’이 탄생한 것이다.
그러나 진정으로 그들의 줄서기가
자발적인지에 대해서는 다른 생각이
있을 수 있다.
그 줄서기가 경영기법에 의해 기획
된 것이거나, ‘사회적 인정에 대한 갈
망에서’ 줄을 선 것이라면 자신도 인
지하지 못한 어떤 힘에 의해 ‘줄 세우
기’에 동참한 것이다. 특히 후자의 경
우 ‘독립적 자아’가 약해 타인의 행위
를 쫓아 경쟁적으로 줄을 서기도 한
다. 자발적 줄서기를 긍정적으로만
볼 수는 없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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